2024-04-26 21:30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1.06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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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51)
 200. 만화에 심취한 소년

 임수 선생님은 1927년 개성에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영의였고, 이제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영의는 철이 들자마자 만화를 좋아했다. 그 시절은 일제강점기, 만화라 해봤자 조선 만화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의는 일본의 잡지나 단행본으로 야나가와 고이치나 기타 고이지 등의 작품을 읽으며 만화에 심취했다. 영의는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종이가 손에 잡히는 대로 만화를 그려 댔고 종이가 없을 때는 벽에 숯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웃들이 자기 집 벽이 숯으로 범벅된 것을 보고 찾아와 영의 부모에게 화를 내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환쟁이는 빌어먹는 직업인데, 왜 그림을 그리느냐! 다시는 그리지 말아라”하면서 담뱃대로 종아리를 때렸다. 그러나 그의 만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결국 만화 때문에 다니던 중학교도 중퇴하게 하게 된다.

 영의는 자라서 청년이 되도록 만화를 손에 놓지 않았다. 만화를 그린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18살이 되던 해, 나라는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 조선은 남북으로 나눠지고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된다. 이때 개성에 미군 문화원(USIS)이 들어선다.

 영의가 20살이 됐을 때 문화원에 반공포스터를 제작하는 부서가 생겼다. 소문으로 그림을 그리고 월급을 준다는 것이었다. 영의는 그림을 배우며 일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기가 그린 만화 5점을 가지고 문화원을 찾아간다.

 문화원 원장은 영의의 그림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날로 문화원 화가로 채용시킨다. 그곳의 직원은 20여 명 정도로 영의는 상사의 지시대로 그림을 그렸다. 직원 중 영의보다 3살 위인 인텔리화가 한 분이 있었는데, 바로 이 분이 당대 최고의 삽화가 우경희 선생님이시다. 우경희 선생님은 일본 동경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다가 문화원이 생기면서 스카우트돼 온 것이다.

 영의는 작업 외에 틈만 나면 만화를 그렸는데, 옆자리에 있던 우경희는 영의에게 “이것도 그림이냐. 이런 그림에 미치면 네 인생을 망치는 거야”하면서 핀잔을 줬다.

 영의는 기분이 상해 ‘자기는 순수 미술로 가면 되고, 나는 만화로 나갈 텐데 왜 나의 인생길에다 그런 말을 하는거지’하면서 속으로 울화통이 터졌지만, 우경희는 문화원의 주요 멤버이고 나이도 많으니 치솟아 오르는 화를 꾹꾹 참아 넘기곤 했다.

 그렇게 문화원에서의 순탄하던 어느 날, 문화원에 난리가 난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인민군이 물밀 듯이 밀려와 금세 개성을 점령해 버렸고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게 된다. 인민군에게 잡히면 선착순으로 사형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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