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21:54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9.18 2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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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18)
 169. 치열한 제작 과정

 선생님과 세기상사의 계약 조건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제작 완료 기간을 1966년 12월 말까지, 또 선생님의 감독료는 입장 수입의 10%로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기간을 지켜 제작을 완료하고, 작품이 인기를 몬다면 큰 횡재를 할수 있는 계약이었다.

 우선 계약금 200만 원을 받은 후 1966년 3월부터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제일 큰 난관은 제작에 참여할 애니메이터가 없다는 것이다.

 장편 애니메이션을 전혀 해보지 않은 나라에서 한 명의 작가가 8개월 만에 그것을 제작하겠다고 계약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한심하기도 하고, 혹은 기적같은 일이기도 하다.

 1966년, 날마다 수백개의 만화대여점이 생겨나고 하루에 50여 권씩의 만화책이 쏟아져 나올 무렵이다.

 이런 황금기에 합동 출판사의 횡포로 도산하는 출판사가 생겨났고, 작가들은 작품을 팔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동헌 선생님은 이 현실을 착안하고 일간지 신문에 애니메이터 모집 광고를 낸다.

 나는 그 무렵 불광동 덕박골에서 거래하는 출판사가 들쑥날쑥해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때 세기상사에서 낸 애니메이터 모집 광고를 보고 잠시 유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의 동화 작업은 창작이 아닌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어 애니메이션 쪽으로 전향 하지 않았다.

 이 홍보 광고를 보고 지망생이 모여들었고 신동헌 선생님은 그들을 선별해 제작에 동참 시켰다. 동화의 주역들은 신동헌 선생님을 비롯 신동우, 배영랑, 이준웅 등 만화계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작가와 무명의 지망생, 그리고 채색을 맡을 인원 등 30여 명의 스텝으로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신동헌 선생님도 장편 만화영화에 경험이 없어 그분 지시에 따르는 작가들의 수준은 더 형편 없었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일본의 기술책을 꼼꼼히 익히면서 기술을 항상시켰다.

 그 노력에도 영상 속의 움직임은 여전히 어설펐고, 선생님은 과감히 폐기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그리기도 했다. 그 통에 제작비가 바닥이 나기 시작한다. 계약금으로 받은 돈은 이미 직원들 월급으로 소진된 상태다.

 자금이 떨어져 채색 재료를 살 돈이 부족해 청계천에서 미군 부대가 사용하고 버린 항공 필름을 사서 그것을 양잿물로 씻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약속한 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마무리 쯤에는 직원들이 집에 가지도 않은 채 밤낮으로 작업에 몰두 한다.

 모두들 계약일을 지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고, 이제 촬영 작업이 거진 끝이 나고 녹음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12월이 끝나고 다음 해 1월이 되고 만다. 며칠 여유만 있었다면 계약일을 지켰을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작업은 1967년 초순에 끝이 났다.

 힘들었지만 그렇게 모두의 노력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달 20일, 드디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이 대한 극장에서 개봉을 되게 된다.

 인기는 대단했다. 하루 매회마다 전 좌석은 꽉꽉 채워졌다. 개봉 4일 만에 10만 관중이 관람했고 며칠 후에는 20만 관중이 기록된다. 대박이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장래는 밝을 것이다.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한 세기상사 소송부와 순수한 창작 의지를 가지고 제작에 동참한 신동헌 선생님은 이 대박 앞에서의 처세가 너무나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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