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21:33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9.1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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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15)
 음식을 나르는 등 예배실은 잠시 정돈됐고, 금세 잔치 방이 됐다. 에드윈 목사님이 딸 네시아를 번쩍 들어 테이블에 올려놓자 성도들이 주위를 둘러 쌌고, 생일 축하 노래가 이어진다. “해피 벌스데이 투 유…” 노래가 끝나고 모두 박수를 치며 네시아의 두 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웃고 즐겼다. 먼 타국 생활의 어려움도, 외로움도 잊혀졌다. 네시아의 생일 축하 자리지만, 마치 자신들이 축하를 받는 듯 즐겁고 기쁜 모습이다. 예배실은 정겨운 분위기로 익어 갔다.

 166. 애니메이션의 개척자 신동헌

 ‘만화가 신동헌’이라 하면 일반인은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을 연상한다. 하지만 신동헌 선생님의 업적을 100%로 볼 때 홍길동 제작은 불과 2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추측하기에는 홍길동 이전의 창작 활동이 20%, 나머지 55%는 한국에 일본 만화 임가공 수출 애니메이션의 길을 트고, 많은 애니메이터를 배출해 한때는 한국이 애니메이션 임가공 수출 강국으로 부상케 한 업적이다.

 빈민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애니메이션은 수출 증대에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덕에 한국 애니메이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꽤 돈을 벌었다. 그러나 이점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배부른 기러기가 날지 못해 목적지에 가지 못한 것처럼 배부른 한국 애니메이션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게 된 것이다.

 지금 한국은 일본과의 경쟁에서 전자계, 자동차, 선박, 체육, 가요계, 영화ㆍ드라마 등 거진 모든 분야에서 일본과 버금가거나 혹은 앞서 있는 입장이다. 그런데 유독 애니메이션만은 일본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

 홍길동이 제작될 당시인 1967년에는 우주 소년 아톰, 리본의 기사, 사파이어 공주 등으로 만화 잡지에서 히트를 치고 있던 만화가 데스카 오사무 선생님이 1963년부터 흑백 TV에 ‘우주 소년 아톰’을 제작, 방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5년, 비로써 컬러 애니메이션 ‘정글 대제’를 제작했다. 그런데 불과 3년 뒤 한국에서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제작됐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해 일본 데스카 오사무 프로덕션에서 극장용 애니에이션 ‘천일 야화’가 제작된다.

 이런 상황을 보면 그 당시 일본과 한국의 애니메이션의 수준 차이는 아주 미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넘지 못할 벽처럼 제작 실력이나 시장 규모가 하늘과 땅 차이다.

 그 이유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신동헌 선생님은 192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회령은 두만강가에 위치해 있으며 영화감독 나운규와 윤봉춘 선생님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신동헌 선생님은 칠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며, 막내가 만화작가로 유명한 신동우 선생님이다.

 해방이 되고 이듬해 선생님은 38선을 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처음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명동이나 덕수궁 근처에서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주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홍보용으로 펜화를 전시하고 있는데, 어느 중년 신사가 다가와서 그림을 칭찬하며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 작가 야나가와 고이치, 기타 고이지 선생님의 그림을 보고 연습했다”고 답한다. 그러자 신사는 그 기타 고이지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분이 한국 만화계의 거장 김용환 선생이었다. 두 분은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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