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7:30 (토)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7.23 2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억의 삼천포 시절(181)
 140. 백지 수표의 유혹

 당시 한국일보 장기영 회장님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 대표로 북한에서 김일성과 회담을 했었다.

 또 장 회장님은 자수성가해 한국일보를 설립했다. 당시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었고, TV가 있다곤 하지만 흑백화면에 가정마다 있지는 않아서 한국일보의 위세는 정말 대단했다.

 이런 대기업이 코흘리개 동네 아이들이 모이는 만화대여점에 눈독을 들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옛날 만화대여점 시장은 대기업도 군침을 흘릴 정도로 짭짤한 시장이었다.

 한국일보의 만화출판사업 진출을 알게 된 합동은 비상이 걸린다.

 이제 한국일보는 시장 조사를 마치고 인쇄소와 사무실을 마련할 단계까지 오게 된다. 한국일보에서 사업에 확신을 가지고 출범 단계까지 왔다는 사실을 파악한 합동에서는 급기야 이영래 회장이 박기정 선생님을 초대해 직접 만나게 된다.

 선생님과 이영래 회장은 참 악연이었다. 껄끄러운 자리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박기정 선생님을 앞에 앉혀 놓은 이영래 회장은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시오? 만화판을 재벌 입에다 떠먹여 주는 일이오. 만화업자도, 만화가도 모두 재벌의 밥이 되고 말거요”라면서 협박 반에 애걸 반을 더해 사정을 한다.

 그래도 선생님이 꿈적도 하지 않자 이영래 회장은 호주머니에서 수표를 한 장 꺼낸다. 그 수표에는 액수가 적혀 있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백지수표다. 이 수표는 받은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액수를 적어 은행에 출금 신청을 하면 은행에서는 적힌 금액대로 돈을 주는 수표이다.

 만약 이 수표로 출금한 뒤 이영래 회장이 은행에 돈을 다시 지불하지 못 하면 아마 회사까지 도산하게 될 것이다. 이영래 회장은 자기 회사의 운명을 걸고 박기정 선생님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표 한 장이면 선생님은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의리의 사나이 박기정 선생님은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합동에 의해 피해를 보고 있는 만화가와 대여점을 생각하면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선생님은 “나는 그것을 도저히 받을 수 없소, 내 동료들을 배반할 수 없소”라면서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이제 합동과 한국일보는 만화대여점 시장을 놓고 피 튀기는 일전만 남겨놨다.

 합동은 한국일보로 원고를 접수하는 만화가들이 없도록 단속에 들어갔고, 한국일보는 인쇄소를 구로동 허허벌판에(현재 구로역 근처) 한 채 달랑 서 있는 한국전자라는 인쇄소에 사무실을 차리고 작가들의 원고를 접수 받았다.

 또 합동에서는 따로 제2한강교 건너 만화작가를 모아 원고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