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1:36 (토)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5.18 2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억의 삼천포 시절(134)
 모나리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아침밥을 먹은 뒤 대충 집안일을 하고 걸어서 홍제동 대로길 불광동 넘어가는 길로 나서면 작은 ‘모나리자 다방’에 이른다. 처음엔 손님이 많지 않았지만, 타고난 미모와 상냥함으로 단골이 늘어났다. 그렇게 점점 손님이 차츰 많아졌고, 늦은 저녁까지 찾아오는 손님도 생겼다.

 이전의 결혼 생활은 선생님이 시내로 나가면 모나리자가 집에서 그를 홀로 기다렸는데, 이제는 선생님이 늦게 들어오는 모나리자를 기다렸다.

 영업은 잘됐고 모나리자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손님들도 생겼다. 이들 중에는 인근 수색부대의 젊은 장교가 있었는데, 그는 젊은 마담의 미모와 친절함이 좋았고, 모나리자는 선생님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젊고 신선한 매력의 장교가 좋았다. 둘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키워갔고 그만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선생님은 그제야 둘의 관계를 알아차렸지만, 그때는 둘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결국 모나리자는 짐을 싸 집을 나가 버리고 만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늘 그림이 먼저였고 모나리자는 두 번째였다. 모나리자는 항상 옆에 있을 줄 알았다. 모나리자를 위해 하루라도 시간을 내어 준 적도 없었다. 선생님은 후회했지만 그런다고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사람 말로는 한 번씩 모나리자가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선생님은 모나리자가 집을 나간 것이 자기가 그림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싫어졌다. 그때부터 그림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곧 5ㆍ16군사정변이 일어나고 전국은 한바탕 소용돌이가 치더니 다시 차분해졌다. 이때 ‘국가 재건 최고회의’라는 것이 발족했고 국가를 쇄신한다는 명목으로 문화계에서는 만화를 쓸모없는 낭비의 사업이라 몰아붙이고 단행본과 전문 잡지를 폐간시켜 버린다.

 그리고 남겨 놓은 대본소용 만화는 대본소라는 한계된 보급로 때문에 책 부수가 정해져 있어 내용이나 제본이 부실해 그쪽에 맞춰 원고를 제작할 처지가 못됐다.

 이제 남겨진 교양 잡지 ‘학원’에서는 연재되는 코주부 삼국지의 내용 중, 두 장수가 말을 타고 싸우다가 한 장수가 칼을 휘둘러 상대방의 목을 치면, 칼을 맞은 장수의 목이 축구공처럼 나뒹구는 장면이 자주 나오고, 이 장면이 작품의 감초 역할을 하면서 인기가 있었는데, 검열관이 그 장면은 청소년들에게 위해 된다고 삭제하라는 것이다.

 모나리자 때문에 작품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시기에 만화판 마저 실망을 안겨주자, 선생님은 활동을 포기한다. 그래서 연재 중이던 작품도 중단하시고, ‘자유의 벗’은 김영주 화백에게 자리를 내주시고, 또 코주부 캐릭터의 모든 판권은 제자인 이원수 선생님에게 넘겨 버린다.

 선생님의 결정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여태껏 소박한 민초들의 삶을 그리고 또 역사를 그려 왔던 조국까지 등지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떠나신다.

 그때가 1962년쯤이다. 한국 만화계의 큰 별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을 등진 것이다. 한국 만화계는 그렇게 아까운 인재를 떠나 보내야만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