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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5.14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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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32)
 101. 최고의 전성기

 1951년은 계속되던 6ㆍ25전쟁이 38선을 기준으로 서로 밀고, 밀리지도 않는 휴전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김용환 선생님은 전쟁에서 두 번의 고비를 넘기고, 평온한 생활을 이어가며 다시 작품 활동에 전력을 쏟으신다. 그러던 중 대구에서 김익달이란 분에게서 연락이 온다.

 김익달은 부잣집 아들로서 “내가 가진 재산을 6ㆍ25전쟁으로 꿈을 잃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공헌하겠다”라고 선생님께 말했다. 김익달의 계획은 장학회를 만들어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가난한 학생들의 공부를 시키겠다는 것이고, 다음은 한국 학생들이 읽을 유익한 잡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선생님에게는 가뭄에 찌든 논에 단비가 내리는 듯 희소식 같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김익달의 사업에 적극 동참하기로 한다.

 그렇게 탄생된 잡지가 ‘학원’ 잡지이다. 선생님은 그 잡지에서 만화 ‘코주부 삼국지’를 연재하고 또 정비석, 김래성, 조은파 선생님의 소설이 함께 연재됐는데 그 소설 중에서 골라 삽화도 그렸다. 그렇게 선생님은 학원 잡지를 살려놓는데 큰 공헌을 하신 것이다.

 잡지는 출간되자마자 1만 부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뒀고 1954년 8월 호는 8만 부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지금으로는 8만 부가 대수롭지 않지만, 가난한 시절에 싸지도 않은 잡지가 그렇게 팔렸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당시는 일간지 신문의 최고 부수가 5만 부였다. 김익달 사장의 계획은 맞아떨어진 것이다.

 모두들 그때는 TV도 없고 놀만 한 것이 없어 학원 잡지가 많이 팔렸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이다. 김용환 선생님이 떠난 후의 학원은 점차 기력을 잃어갔고 잡지가 인기가 없어져, 폐간될 무렵에도 TV가 시원하게 보급되지 않았고, 학생들의 놀 것은 여전히 없었다.

 그 뒤 학원의 창업자 김익달 사장은 해마다 20~30명 정도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했고, 진학, 여원, 주부생활 등 많은 잡지와 백과사전 등 3천종의 책을 제작하며 한국 출판계에 거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김용환 선생님은 만화가들을 모아 ‘대한만화가협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이 되시기도 한다.

 1959년부터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부에서 한국인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잡지 ‘자유의 벗’을 창간하면서 선생님에게 그림을 청탁해 선생님은 그림을 그려 일본으로 보내곤 했다.

 그때 자유의 벗에서 한국 서민들의 생활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렸는데, 스스럼없이 민초들을 표현하고 고증을 살려냈고 펜 터치와 붓 놀림 등은 가히 타인은 흉내도 못 낼 지경이었다. 그때가 선생님의 작품 활동 중 최고의 가치와 실력을 발휘했던 시기였다.

 학원과 자유의 벗에 연재하던 시기에 선생님의 나이는 40대 후반이셨고, 소득도 당시 한국의 개인사업 세금 납부 실적에서 연예인ㆍ변호사ㆍ의사ㆍ소설가 등을 통틀어 선생님은 최고의 실적을 보였다.

 만화 황금기 시절, 한국 만화가들의 수입은 타 예술인이나, 문화인들보다 월등하게 많았다. 선생님에게는 그때가 최고의 전성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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