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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5.1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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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31)
 선생님은 청년에게 자신은 본래 한국 사람이고, 고국에 와서 김용환이라는 본명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 뒤 청년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 청년은 자신의 이름은 ‘신동헌’이고 처음에는 중국에 살다가 이북까지 가서 월남을 했다고 소개했다.

 그 후 선생님은 청년을 만화를 그릴 수 있게 알선했고, 신동헌 선생님은 나중에 한국 애니메이션을 개척하는 대가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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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환 선생님의 작품은 사상적인 면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뚜렷하게 어느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저 그리고 싶은 시대를 그렸고 또 신문이나 사회단체, 국가에서 시대 그림이 필요해 청탁을 하면 그려주곤 했다.

 그러했기에 어지러운 난국 속에서도 장수할 수 있었고, 많은 작품도 남길 수 있었다. 한 번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학교 급우의 소개로 들어간 출판사 ‘고단샤’에서 한국인 징병 홍보 만화를 그리는 편집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일 때문에 해방된 후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신다. 또 1947년에 상반신은 소련군과 춤을 추고 하반신은 미군과 춤을 추는 여인을 그려 분단국가의 아픔을 표현하기도 했다.

 자기가 만든 만화 잡지에서 해방의 조국을 리얼하게 표현하고는 했는데 그것 때문에 이승만 정부의 탄합으로 폐간 조치가 내려졌었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고 주간만화를 재발간했지만, 그해 여름 6ㆍ25전쟁이 발발한다.

 인민군이 서울로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피난을 떠났지만 불행하게도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바람에 인민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인민군에게 잡힌 선생님은 두 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받게 되는데 첫 번째는 한국에서 지배 계급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전에 유엔군의 청탁으로 김일성을 비하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는 것. 두 죄목 중 어느 것도 사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사형 직전, 인민군 책임자가 선생님의 김일성을 비하한 그림을 살피다가 그 솜씨가 너무나 좋아서 문득 인민군 선전 화가로 삼으면 꽤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선생님의 사형을 취소하고 석방하는 대신, 인민군 부역 대학에서 홍보 그림을 그리도록 한다.

 그때 선생님의 그림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김일성의 구두에 차여 코피를 흘리며 부산 앞바다에 빠지는 그림이 유명했다.

 그렇게 몇 달 후 홍보부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유엔군이 북진하고 있는 것을 직감한 선생님은 사무실을 빠져나와 외딴곳에 숨어 버린다. 그 후 선생님은 국군과 유엔군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회복된 세상은 선생님의 것이 아니었다. 유엔군은 선생님을 인민군의 홍보 그림을 그렸다는 죄목으로 체포한다.

 자칫하면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는 살벌한 시대였다. 그렇게 잡힌 선생님은 무엇으로 보나 사형이 불가피했다.

 몇 달 전과 대상은 바뀌었지만 상황은 똑같았다. 사형을 결정하는 책임자는 선생님이 그린 그림을 보고 실력에 감동을 하고, 유엔군 사령부의 홍보 그림을 그리는 조건으로 석방한다. 두 번씩이나 그림 실력이 선생님을 살린 것이다.

 이때 석방돼서 그린 것 중 김일성이 국군에 쫓기다가 갈 곳이 없어 두만강에 빠져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는 그림이 유명하다.

 선생님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실로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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