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은 이날 착공식을 시작으로 사업비 52억 원(국비 11억 7천만 원, 도비 8억 6천만 원, 군비 29억 7천만 원, 기념사업회 2억 원)을 들여, 부지 3천655㎡에 생가복원30㎡, 기념관 면적 727.15㎡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전시장, 기념품 매장, 기록보관실, 사무실 등을 갖춘 손양원기념관을 오는 12월에 완공할 예정이다.
손양원의 기념관은 생애 체감내용으로 죽음의 예감가면서 그 길을 걸어간 손양원의 고통과 신념의 `순교의 길` 세상과 단절된 고립공간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은 `옥고의 고통`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한 `애향원과의 사랑` 아들을 잃은 아픔에 용서와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용서와 감사` 성장기 손양원에게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의 존재 `생애의 시작` 등의 시설을 갖춘 군민들의 문화향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가생활을 누릴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된다.
특히 손양원기념관은 포장이 없던 손양원의 삶을 현세의 명예를 바라지 않았던 그 분의 삶의 기리며 모두(咸) 어울어지는(愛) 동산(園)으로 자연과 함게 어우러지는 기념관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또 25일은 칠원교회에서 서울 중동고 총 동문회장 백강수 변호사가 허호승 함안부군수에게 손양원 애국지사 명예졸업장을 전수할 예정이다. 손양원 애국지사는 1919년 4월 서울중동학교 입학하고 1920년 4월 자퇴했다.
이만열 (사)산돌 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손양원 생가와 기념관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며 "오늘날 혈연, 지연, 학연과 이념으로 분열되고 갈등과 투쟁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용서와 화해, 평화를 상징하는 귀한 성지가 돼 그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이 이곳을 통해 평화의 메시지로 널리 꽃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고 손양원(호는 산돌)은 경남 함안(咸安) 출생. 1910년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7년 선교사 맹호은(孟晧恩)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3년 일본 스가모중학교룒巢鴨中學校룓를 졸업하고 귀국해, 1929년 경남성경학교(慶南聖經學校)를 졸업, 1934년까지 밀양ㆍ울산ㆍ부산 등지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다시 신학을 지망,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여수의 나병환자들의 수용소인 애양원(愛養園) 교회에 부임해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