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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특종은 마산 자존심… 왜곡 안타까워”
“김주열 특종은 마산 자존심… 왜곡 안타까워”
  • 황철성 기자
  • 승인 2014.04.17 2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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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9 혁명 54주년
▲ 올해로 4ㆍ19혁명이 54주년을 맞았다. 사진은 국립 3ㆍ15민주묘역 전시관 전경.
허종 기자 사진 통신사 통해 전 세계 전파
유족 가족회의 이만섭 발언은 고인 기만

 올해로 4ㆍ19혁명 발생 54주년을 맞는다.

 4ㆍ19혁명 운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하면 대부분이 김주열 열사를 꼽고 있다.

 김주열 열사는 4ㆍ19혁명의 도화선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현재까지 역사의 인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다.

 당시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권이 불법개헌을 하면서까지 12년의 장기 집권을 해오던 상황으로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자유당 정권에서는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이에 분노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 가운데 마산상고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김주열 열사 역시 시위에 참가해 자유당 정권 측의 총격과 폭력 등의 무력으로 강제진압을 당하면서 학생과 시민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고문을 자행했다.

▲ 故 김주열 열사를 찍은 故 허 종 씨의 특종 사진.
 시위가 잠잠해지는 듯싶었으나 시위 중 실종됐던 김주열 열사가 27일 만인 4월 11일 왼쪽 눈에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눈부터 머리까지 최루탄이 관통한 모습은 참혹할 따름이었다.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 최루탄은 벽을 뚫기 위해 만들어졌던 무장폭도용 최루탄이었다고 알려졌다.

 결국 3ㆍ15 부정선거에 이어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발견되면서 그의 참혹한 죽음에 분노한 국민들의 의해 4ㆍ19혁명이 시작됐다.

 김주열 열사는 4ㆍ19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마산에서 시작된 4ㆍ19혁명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환멸을 느끼던 국민들의 저항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당시 정부의 무력대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피해를 입었지만 그에 굽히지 않고 투쟁했던 시민에 의해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됐다.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국민들의 분노와 시위의 불꽃을 전국적으로 퍼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기증 사실인 것이다. 이에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지인 마산 중앙부두에 민주화 운동 관련 장소 중 처음으로 문화재 경상남도 기념물 227호로 지정됐다.

▲ 3ㆍ15의거 기념탑 부조.
 하지만 김주열 열사의 참혹한 사진과 시신 발견 소식을 전 부산일보 마산주재 허 종 기자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허 기자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고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4ㆍ19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최근 4ㆍ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의 최초 사진 보도를 놓고 논란을 빚고 있다. 최초 특종 보도한 허종 씨의 유족들이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 종 기자의 유족이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공적을 자신의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데 따른 명예훼손으로 지난 15일 검찰에 고소했다.

 유족 측은 이 전 국회의장이 최근 몇 년간 방송 출연과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등에서 자신이 김주열 열사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는 취지로 수차례 발언했다고 주장했다.

 유족 측에 따르면 이 전 국회의장은 지난 3월 10일 모 종편방송에 출연해 “김주열이 최루탄 박혀 바다에서 나오는 걸 내가 취재해서 특종했지. 내가 4ㆍ19 주역이야”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또 “김주열의 사진을 최초 특종 보도한 기자는 부친(허종)이며 그 신문은 부산일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며 “그런데도 이만섭 씨는 해당 보도가 본인과 동아일보의 공적이라고 거짓 주장해 부친과 가족의 명예에 큰 상처를 줬다”고 지적했다.

 허 기자의 유족 중 셋째인 허태인 씨는 “3월 14일이 부친 기일인데 이날 가족회의를 거쳐 이만섭 전 의장을 고소하기로 결정했다”며 “지도자로서 진실을 목숨같이 생각해야 할 분이 그렇게 고인을 기만할 수 있냐. 마산 자존심이고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왜곡하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한 관계자는 “당시 동아일보가 4ㆍ19혁명 관련 집중보도를 한 것은 맞지만 김주열 죽음 사진을 최초 보도한 것은 허종기자가 맞다”며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는 당시 마산에 있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 이 사진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됐으며 4ㆍ19혁명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으며, 허 씨는 2012년 국가보훈처로부터 4ㆍ19혁명 유공자로 선정돼 건국포장을 추서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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