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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묻어있는 명소 그곳을 걸으며…-미륵산 가는길
추억이 묻어있는 명소 그곳을 걸으며…-미륵산 가는길
  • 김루어
  • 승인 2014.04.04 07:3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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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문화 파노라마가 숨쉬는 통영
역사로… 문학으로… 그림으로 다가오고

島島히 펼쳐진 섬들의 무게 가슴 누른다

 통영은 황홀한 파노라마 전시관과 같다. 대저, 어떤 지역에 한 부분의 특성이 강렬할 경우는 그 부분으로써 그 지역을 표상하더라도 크게 비난 받지는 않는다. 특히 중소도시는 더욱 그러하다. 가령, 안동은 유림의 고장, 전주는 음식문화의 고장, 이라는 식으로 말하더라도. 그러나 통영은 한 부분으로써 전체를 표상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통영을 이루는 부분, 부분들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통영은 어떤 이에게는 역사로, 어떤 이에게는 문학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음악으로, 또 다른 이들에게는 그림으로 다가간다. 거기 더하여 통영에는 꽃이 있고 풍경이 있고 맛이 있다. 그런데 통영에서는 이 모든 부분,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 때문에 빛을 잃거나 향을 잃는 법이 결코 없다. 한 부분 때문에 다른 부분이 가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 부분이 강렬해서 다른 부분들이 돋보인다. 나로 하여 남이 돋보인다, 남으로 하여 내가 돋보인다. 그게 통영이다.

 나그네들에게 처음 다가가는 통영은 아마 역사적 측면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 역사의 중심에 충무공 이순신이 있다. 충무공은 통영의 첫머리에 서 있기도 하다. 임진왜란 시 공이 한산대승첩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꾼 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생겼고 통영이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연원되기 때문이다. 통영과 충무공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 어른에 대한 통영인들의 숭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순조실록이 증언한다: 1808년 충무공 기일에도 통영인들은 소복을 입었다, 고. 물경, 공이 순국한 지 2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이다. 그 숭모는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졌고 현재에도 매년 한산대첩축제로 이어진다. 역사가 이러할진대 통영시를 걷다 곳곳에서 공의 유적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일까?

 통영시를 걷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유적지들은 우리 근현대 문화사에서 폭죽처럼 타 올랐던 이름들이다: 유치진,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박경리, 윤이상, 전혁림… 한 손으로 헤기에 벅찬 이름들이다. 놀라운 점은 이들은 거진 동시대, 동향인들이란 사실이다. 이들의 흔적을 쫓다 얼마간 주눅이 들 때쯤이면 통영은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마력으로 나그네를 이끈다. 남망산공원의 조각들이, 동피랑의 벽화들이,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늘 푸른 잎으로 반짝이는 동백나무들이.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동백꽃은 벌써 지고 있다.

 꽃 지는 서운함은 공복감으로 엄습되는 것일까? 걸음은 자연 먹거리로 넘치는 시장골목으로 향하게 된다. 시장에는 살아 펄떡이는 해물들과 상인들 호객소리와 나그네들의 발길로 흥청거린다. 나그네들은 싱싱한 해물 안주거리를 사들고 양념값만 내면 먹을 수 있는 횟집으로 간다. 하지만 빈속인 나는 식당으로 갔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 했던가? 도다리쑥국을 시켰다. 통영에서 도다리쑥국 한 그릇 먹는 것은 봄을 마시는 일이다. 도다리로 맑은 국을 끓인 뒤 그 위에 어린 쑥으로 향을 낸 탕은, 혀에서 녹는 도다리살과 상큼한 쑥내음으로 코에 남는다.

 시장통을 빠져나와 통영항 문화마당에 섰다. 아침부터 해가 기울도록 돌아다닌, 여황산기슭에 자리를 튼 통영시가를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은 마치 갓 파노라마 전시관에서 빠져나온 듯 어지러웠고 걸음은 취한 듯 비틀거렸다. 역사에, 문학에, 음악에, 그림에, 맛에, 꽃에, 풍경에 취한 여진 때문이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몸을 돌렸다. 눈앞에 바다라기보다는, 물이 잔잔하게 고인 내륙호수와 같은 느낌을 주는 항구가 펼쳐졌다. 통영은 이 항구를 축으로 여황산이 부챗살처럼 일어나 펼쳐진 도시다. 문득, 여기에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만든 시원(始原)은 바다… 그렇다. 바다가 여황산의 부챗살 같은 줄기를 따라 올라가 역사를, 문학을, 음악을, 그림을, 맛을, 꽃을, 풍경을 만들었으리라. 그리고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물산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외지인도 통영에 오면 소금처럼 저 바다에 녹아 통영바닷물이 된다. 백석이 그렇고 중섭이 그렇고 이영도가 그렇다. 또 있다, 효봉!

 나는 효봉도 만나고 싶다, 애초 목적지인 미륵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해안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차창 밖으로 갈매기 떼가 쪽빛바다 위에 온갖 곡선을 그리며 활공하고 있었다. 얼마 달리지 않아 통영대교가 나타났고 그 너머는 미륵도였다. 미륵도는 섬이면서 섬이 아니다. 섬과 육지를 가르는 좁은 해협이 한 개의 터널과 두 개의 다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리를 지나자 바로 섬이었고, 오른쪽으로 펼쳐진 길은 해안선이 왼쪽으로 완만히 꺾이는 산양일주도로였다. 곳곳에, 햇살에 그 엷은 청동빛 잎이 반짝이는 동백나무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도 꽃은 이미 지고 있는듯했다.

 해안선을 따라 자맥질하듯 어촌마을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몇 번째나 되는 걸까를 헤아려 볼 즈음 달아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통영의 섬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차를 세우지 않았다. 더 높은 곳, 미륵이 하생한다는 산정에서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다. 그렇다, 이 섬은 미륵불이 하생한다는 전설이 서린 산을 품은 섬이었다. 그 산 이름은 미륵산이었고, 섬도 산 이름을 따 미륵도가 되었다. 스쳐 가는 표지판들이 차례로 바뀐다. 신전삼거리, 수산과학관, 영운리… 차는 영운초교에서 효봉이 만년 십여 년을 보낸 미래사로 가기위해 좌회전했다.

 미래사로 가는 산길은 좁고 험한 편이었지만 양옆으로 일어서는 수림은 울창했다. 이어 하늘을 찌를 듯한 편백나무숲이 나타났다. 절 입구 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렸다. 여전히 편백나무숲이었고 ㅁ자형 조촐한 절집인 미래사는 그 숲 속에 한 송이 연꽃처럼 안좌해 있었다. 절집입구 왼쪽에 석두, 효봉, 구산 조자손을 모신 부도탑과 비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판사였던 효봉은 한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깊은 회의에 빠진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라는. 이 회의는 그로 하여금 엿판을 메고 3년간 전국을 떠돌게 하더니 이윽고는 금강산에서 석두에게 수계를 받고 출가하게 만든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절집에 들기 전에 효봉이 좌선하던 토굴을 찾아 나섰다, 편백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 가슴이 상쾌해졌다.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강렬한 피톤치드 때문이다. 여기 살면 디톡스요법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든 것인지 토굴을 찾기가 쉽지 않아, 대신 입석미륵불 옆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효봉이 좌선했을법한 자리에 멈췄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멀리보이는 바다를 보며 효봉을 생각했다. 효봉은 늦깎이였지만 좌선에 들면 엉덩이가 무를 정도의 장좌불와 수행과 하루 한 끼로 무문관에서 일 년 반 동안 용맹 정진한 수행승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어리석게 본 어떤 교가납자가 물었다: 깨달음이란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것과 같은바, 고기를 잡는 데는 그물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첩경일진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물 쓰는 법이라 할 경전은 공부하지 않고 참선만 하는가? 긴 질문에 효봉은 딱 한마디로 대답했다: 참선은 한입에 바다를 삼키는 공부라오!

 미래사에서 부처님을 뵈옵고 미륵산 정상을 향해 걸었다. 정상까지 1.2km에 불과하여 천천히 올라도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라고 산행객 가운데 누군가가 일러줬지만, 그때 내 기분은 정상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거북이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고질이 있는 무릎으로 대여섯 시간 걷느라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산길은 짐작보다 가팔랐고 걸을수록 정상은 더 높아 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륵불께서는 56억 7천만년 뒤에 오신다지 않는가. 그 이전에는 닿겠지 하는 각오로 걷다 쉬고 쉬다 걸었다. 저만큼, 케이블카로 올라온 혹은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나무데크가 보인 것은 두 시간쯤 뒤였는데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나무데크를 따라 오 분쯤 오르다 정상 직전인 신선대 전망대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정상에서 바다를 전망하겠다는 고집으로 바다를 외면하고 데크 가운데 세워진 정지용 문장비를 읽으며 무릎을 주물렀다. 무릎이 좀 나아진 듯하여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마침내 미륵산 정상에 섰다.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일몰이 시작되는 하늘과 바다, 그 바다 위에 뜬 크고 작은 섬들이 도도(島島)히 펼쳐진 유한 바다… 무한 바다는 그 너머에 있을 터이었다. 섬과 바다, 하늘의 어우러짐이 더없이 황홀했다. 저 아름다움을 감히 글로 그려낼 수 있을까? 지용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는 문장비에서 저 아름다움을,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실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실토를 역량부족에 대한 고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 된다. 은근슬쩍 저 바다를 만중운산 속의 호수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옹색하기 짝이 없는 비유다. 이는, 한없이 밖으로 펼쳐 나가는 바다를 호수로 만들어 첩첩산중에 가둬 버리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적 사고에 다름 아니다. 그의 이런 사고는, 충무공 전첩은 문헌에 충분하므로 새삼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역사관에서도 드러난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역사관이다. 문헌만으로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역사는 문헌을 끊임없이 현재로 재해석 해내는 것이다. 폐일언하자면, 지용의 문장비는 미륵산전망대에 서 있을 자격이 없는 비석이다. 미륵산 정상에 서 있을 문장은 최소한, 충무공의 우국이 담기고 바다를 한입에 삼키고자 하는 효봉의 기상이 서린 문장이어야 한다. 더구나 이 산은 장차 미륵이 하생하여 세상 모든 중생을 구원할 자리가 아닌가!

 다시 바다를 본다. 일몰로 하여 바다는 장엄한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크고 작은 저 도도(島島)히 펼쳐진 섬들의 유한 바다가. 무한 바다는 그 너머에 있다. 우리 역사는 저 유한 바다를 지키고, 되찾는데 많은 비용을 치렀다. 유한 바다를 지키고 무한바다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후인들의 몫이다.

시인 김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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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선 2014-04-06 17:22:16
바다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제 그릇이 바다를 품기엔 너무
작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면 큰 그릇이셨던 분들을 떠올려봅니다.
우리는 너무 작은 울타리에서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시인님의 글을 읽고 통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질 것 같습니다.
시인님. 바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먼 곳을 굽이쳐 흐르는 생명이고 싶습니다

임종관 2014-04-04 10:47:32
글을 읽다 보니 여행을 진짜 맛잇게 하려면 선생님 처럼 그 고장의 역사,문화,음식,풍광을
골고루 느껴야 할 듯 합니다...여유를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