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0:39 (토)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3.11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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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88)
 갑돌이는 산 아래서 살아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산골 마을에서만 살아왔다.

 밭을 매는 갑돌이는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먼 산 아래쪽을 바라본다. 저쪽에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진주가 있겠지, 또 더 멀리는 바다가 있겠지… 하고 바깥 세상을 동경했다.

 그러던 오월 어느 날 정오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갑돌이가 심은 보리가 자라 이삭이 나고, 이삭들이 여물어 가고 있다. 갑돌이는 이 보리밭에서 깜뿌기를 가려서 뽑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산들이 빽빽한 지리산 자락, 바람도 먼지도 소리도 들리는 않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적막한 순간이다. 허공이 텅 비어 있고, 갑돌이 마음도 비어 있다. 공허의 순간이다.

 사람들은 이런 공허한 상태에 귀신이 든다 하고 불교에서는 자신의 가진 것을 모두 비우면 도(道)가 통한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신자가 자기의 모든 정성을 모아 기도하면 성령(聖靈)이 임한다 한다.

 이때 뻐꾹새 한 마리가 보리밭 위로 ‘뻐꾹’ 하면서 울고 간다. 이 ‘뻐꾹’ 소리는 텅 비어 있는 갑돌이 마음에 크게 새겨진다.

 그러자 갑돌이 입에서는 ‘뻐꾹’하는 소리가 나온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새는 울어 대면서 먼 남쪽 하늘로 날아가고 갑돌이는 등을 펴고 뻐꾹가 날아가는 쪽을 바라보며 ‘뻐꾹, 뻐꾹’하면서 따라 울어 댄다.

 텅 빈 갑돌이 마음속에 뻐꾹새 령(靈)이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갑돌이가 먼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뻐꾹새가 부러워 흉내를 내는 것일까? 갑돌이는 뻐꾹새가 사라지는 남쪽 바닷가 쪽을 쳐다보면서 소리를 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집으로 간다.

 방 안 장롱을 열고 옷가지를 챙겨 보따리를 만들어 등에 메고 머리에는 보리대 모자를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먼 산을 향해 ‘뻐꾹, 뻐꾹’ 울어 대면서 집을 나선다.

 그렇게 집과 동네를 빠져나온 갑돌이는 뻐꾹새가 되어 ‘뻐꾹, 뻐꾹’ 울어 대면서 높은 산허리에서 아래로, 아래로… 길이 끝날 때까지 걷게 되었다.

 가다가 배고프면 남의 집에 가서 한 술 얻어먹고, 해가 져서 어두우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하면서, 문산을 거처 진주에 다다르면 진주 시내를 헤매다 다시 남쪽으로 가는 길을 찾으면 그쪽으로 사천을 거쳐 사남면, 용현면, 남양면을 거쳐 삼천포 바다에 막혀 더 가지를 못하면, 어느 친척에게 “삼천포에 가면 로타리 옆에 친척이 양복점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집에 찾아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되돌아 산청 집으로 향하고 했다.

 2014년 요즈음, 나는 서울에서 고향 삼천포로 갈 적에는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 가면 산청에 다다르고, 또 그 산청에서 1시간 조금 넘게 더 가면 삼천포에 도착한다.

 이제는 ‘산청’이란 이정표가 세워진 곳은 산속이 아닌 그냥 평평한 고속도로지만, 그 옛날의 산청은 뻐꾹새 아저씨가 한을 품고 살았던 깊고 깊은 산골 하늘 끝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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