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9:17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2.27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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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80)
 61. 학원 홍보 부스에 들린 노부인.

 그때가 1998년 전후쯤 같은 데,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박광현 선생님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시던, 한국 만화 황금 시절이 막을 내린지 35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시절은 내 인생에 피크였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 초, 주간 경향 ‘하얀 그림자’를 연재하고 어문각의 클로버 문고에서 일본 화풍을 본떠 나름대로 창작한 작품들을 내어놓고, 보물섬, 소년 경향에서 ‘고추장군’을 창작하면서 1급 작가 생활을 이어 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생활은 늘 궁핍했다. 게다가 거래하던 주간 경향, 클로버문고, 소년 경향 등이 문을 닫자 나는 잠시 거처를 잃고 당황하기도 했다.

 만화 영화계는 1980년 이전에 일본 만화영화 임가공 작업이 성행했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도 임가공 작업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 애니메이션 임가공 사업은 큰 호황을 이뤄, 크고 작은 회사들이 80여 곳이나 생겨나곤 했다.

 그런 형편이라 애니메이터들이 태반으로 부족해 회사끼리 스카웃 경쟁이 치열했었다. 나는 잠시 방황하는 시기에 맞춰 애니메이터와 만화가 양성 학원을 설립했는데, 기회가 좋았는지 대성공을 거두고 서울 신림동뿐만 아니라 서울의 제기동, 홍대, 인천의 부천, 부산의 양정까지 5곳의 학원을 설립하고 기세가 하늘로 치솟을 때였다.

 문화체육부에서는 임가공 산업 호황의 계기로 해마다 여름이 되면 한국만화가협회를 지원해주며 삼성동에 있는 코엑스 전시장 1천평 정도를 빌려 만화 전시회를 개최하곤 했다.

 나는 해마다 그 전시회 때 부스 하나를 빌려 우리 학원 홍보를 했다. 나랑 부원장으로 일하는 집사람과 같이 아침 일찍 전시장에 나와 저녁 늦게까지 일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오히려 힘만 더 생기곤 했다.

 그런 어느 날 한창 전시장이 붐비고 있을 무렵인데 60세가 넘은 노부인이 우리 부스에 들어와 이것저것 전단지를 살폈다. 노인분이 찾지 않는 전시장이라 의아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기품이 있는 분이라 예사롭지 않았다.

 이리저리 전단지를 살피던 부인은 나에게 “선생님도 만화 그리요?”하고 묻는다. 그래서 나는 “그렇습니다. 필명이 최경탄입니다. 전에는 작품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후배들 가르치느라 많이 그리지 못합니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노부인은 “우리 남편도 만화를 그렸다오”라고 하신다. 나는 깜짝 놀랐다. 65세 정도의 노부인의 남편이라면 70세에 가까운 나이일 텐데, 그런 분이라면 나에게는 대단한 선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선배라면 몇 손가락 꼽을 정도로 흔치 않은데…. 나는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 다시 노부인에게 “아주머니 남편되시는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 말에 노부인은 “박광현 입니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만화계 대선배이며, 전설 같은 분의 미망인을 내가 앞에 두고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사모님. 나는 박 선생님 생전에 몇 번씩 어울렸던 사이입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잘 지내십니까?”하고 정중히 인사를 드렸더니 노부인은 그 말을 고맙게 받으셨다.

 그리고 나는 또 물었다. “박 선생님은 우리나라 만화계의 대가이십니다. 그분 작품이 모두 보물 취급을 받고 있지요. 집에 박 선생님작품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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