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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天命) 이뤄낸 사마천
천명(天命) 이뤄낸 사마천
  • 박중식
  • 승인 2014.02.11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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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식 김해외국어고등학교 교장
 요즈음 우리나라는 역사 교과서 문제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극심하다. 각자 시각에서 역사적 인물이나 정책에 대해 찬양과 매도를 하고 있다. 어느 나라이든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는 모두 자랑스러운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특히 굴곡이 심했으며, 조선 16대 왕 인조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청나라와 대립하는 실책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희생됐고 국가적 수치스런 일을 당하기도 했다. 어쨋든 進退兩難(진퇴양난)의 사면초가(四面楚歌)에서 역사의 중심에 있던 통치권자가 선택한 길이 잘못됐거나 만족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당시로써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역사 문제로 혼란스러운 지금 불후의 역사책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명심보감’에 地不長 無名之草 天不生 無祿地人(지부장 무명지초 천불생 무록지인)이라는 말이 있다. 땅에서 살아가는 하찮은 풀 한 포기도 이름이 있고 할 일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데 천명을 이뤄낸 사마천은 위인임이 틀림없다.

 “天道 是耶非耶(천도 시야비야)”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이 하늘을 우러러 하늘의 도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며 한탄한다. 중국 춘추시대를 통틀어 가장 악명 높았던 도적 도척은 천수(天壽)를 다하고 충절을 지킨 백이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사실을 기록하면서 분노를 참지 못해 뱉은 말이다. 이는 한편으로 왕의 신망을 받다가 졸지에 궁형(宮刑: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당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다.

 사관(史官)이었던 사마담은 죽음에 임박해 아들 사마천을 부른다. “공자가 서거한지 오백년이 되니 그동안 명군 현신과 충신이 수없이 많았다. 내가 사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족적을 기록할 결심이었으나 급병(急病)해 세상을 뜨니 나를 대신해 그 기록을 남겨다오”하며 유언을 한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맹세를 했다.

 사마천은 약 20세가 되던 해 낭중(郎中:황제의 시종)이 됐으며 사관으로 승승장구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사관의 우두머리)이 됐다. 그러나 한때 친구이었던 이릉(李陵) 장군이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가 투항하게 된다. 사마천은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며 이릉을 변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사마천의 나이 48세 되던 해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을 받았다. 치욕적인 궁형과 죽음 중에서 선택하라는 왕의 명령에서 궁형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간절한 유언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사기’는 BC 9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고대 중국을 무대로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의 역작이다. 사기는 총 130권으로 방대하게 이루어져 있다. 연대를 따라 평면적으로 기록하는 편년체가 아니라, 역사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부각시키는 기전체(紀傳體)로 쓴 최초의 역사서이다. 이 역사서에는 중국의 전설시대 하夏, 은殷, 주周,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가 기록돼 있다. 이 책이 없었다면 중국 고대사도 없었을 것이며, 이 책은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와 무수한 사자성어의 보고寶庫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위해서 중국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역사적 사실을 수집하고, 가문 대대로 수집해 소장하던 역사 자료를 정리했으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했다. 그는 환관(宦官) 신분으로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사기’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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