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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于同 (어우동)
於于同 (어우동)
  • 송종복
  • 승인 2013.12.25 2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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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 종 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경남향토사 수석부회장
於:어 - 어조사, 于:우 - 어조사, 同:동 - 같다

조선 최대의 ‘섹스 스캔들’의 여인으로, 미풍양속을 헤치며 이성간에 난잡하게 노는 여성을 일컬어 ‘어우동’이라 지칭.

 ‘성종실록’에 의하면 본명은 박어을우동(朴於乙于同)인데 ‘용재총화’‘송계만록(松溪漫錄)’ ‘대동시선(大東詩選)’ ‘해동시선’ ‘연려실기술’에는 어우동(於于同)으로 기록돼 있다. 일반적으로 남성과의 풍속을 문란하게 노는 여자를 흔히 나비부인, 자유부인, 젖소부인, 애마부인 이라고 부른다. 9대 성종(成宗, 1457-1494) 때는 양반 지배층이 전체 인구에 비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류층의 특권의식’은 조선시대 통틀어 가히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종실(宗室)의 권위’는 어디 내놓아도 공신(功臣)과 사대부(士大夫) 세력의 위신을 능가할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던 시기에 ‘스캔들’이 터졌다.

 ‘안방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던 어우동(於于同)은 조선 9대 성종 때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충의 딸로 태어나서 종실 명문인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에게 출가해 정4품 혜인(惠人)의 품작까지 받은 양반집 부녀자였다. 그는 어느 날 은그릇을 만들러 온 은장이가 맘에 들어, 그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남편에게 걸려 친정집으로 쫓겨 갔다. 이후 몸종의 도움을 받아 기녀로 위장한 그는 관료, 생원, 서리 등을 가리지 않고 온갖 남자를 섭렵하다가 풍기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시댁이 종실이었으니, 족보를 따지면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가 된다. 그런데 어우동은 지나치게 색을 밝히는 게 탈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석에서 관계를 가졌고,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우동(於宇同)이 태강수의 아내였을 때 팔촌 시아주버니가 되는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와, 육촌 시아주버니인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 등 간통한 다음 소박을 맞았는데 소박맞은 다음에는 본격적인 음부(淫婦)활동에 나선다. 내금위 구전, 학유 홍찬, 생원 이승언, 서리 오종련ㆍ감의형, 생도 박강창, 양인 이근지, 사노 지거비라 등 더 난잡한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문신의 기록이 최초로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어우동이란 점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팔뚝이나 몸에 먹물로 자신의 이름을 문신해 두었다.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창은 팔뚝에, 서리 감의동은 등판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 외에도 병조판서 어유소, 직제학 노공필, 아전 오종연, 과거 합격생 홍찬 등 문신(文身)을 많이 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번좌라는 딸까지 낳았다.

 몇 년 전만 해도 흥등가에서는 온통 어우동 칠갑이었다. 즉 어우동 노래방, 어우동 쇼, 어우동 빠, 어우동 살롱 등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었으니 성에 얼마나 문란한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음부(淫婦)라면 어우동(어을우동)을 거론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남편에게 소박맞고 나서 더 심해졌다. 일반적이라면 수절하고 지내야 정상이지만, 고관대작부터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드는 남자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시대가 많이 변했는데 옛날 유교와 같이 너무 윤리와 도덕을 따진다면 도리어 제 2의 어우동이 출현하지 않나 생각하며, 어우동이 왜 난잡하게 놀았냐하면 남편이 ‘난봉꾼’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남성들의 처신여하에 따라 아내가 평가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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