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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3.12.09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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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6)
 ‘삐라’에는 글도 적혀 있었고 지도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글을 잘 모르는 나는 삐라가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림이 그려 있다는 것이고 그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저 신기한 종이를 손에 쥔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그리고 또 며칠 후에 군호 마을 동네 어귀에 있는 동회 앞에서 나랑 동네 형들이 모여서 인민군들이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형이 그 노래 부르지 말라고 했다.

 다른 형이 그 형한테 “왜 그래”하자 그 형은 앞을 가리킨다. 그래서 살펴보니 재 너머에서 나뭇잎으로 장식한 철모를 쓰고 얼룩이 진 무늬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손에 총을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총에는 태극기가 달려 펄럭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인민군들 하고는 전혀 딴판인 군인들이었다.

 그 두 군인은 아무 일 없는 듯 우리 앞을 지나 다른 곳으로 갔다.

 형들은 그 사람들은 ‘국방군’이라고 했다.

 그때는 이 군호 부락에 있던 인민군들이 어느새 다 도망치고 다시 국군들이 마을을 점령한 것이었다.

 곧 우리 식구는 이 막내 외삼촌 집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흥미롭지마는 어른들에게는 한편으로는 구차한 신세라는 생활도 마침내 끝내고 삼천포 우리 집으로 갈 수 있었다.

 19. 잡지책 ‘학원’

 애니멀즈의 유명한 팝송 ‘해뜨는 집’의 노래와 유사한 직업을 가진 집안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아버지는 신사 양복 재단사이고 우리 집 두 점포 중 한 점포에서 신사 양복 맞춤 점포를 운영하는 분이었다.

 일찍이 아버지는 기술을 일본 사람에게서 배웠는데, 삼천포에서 한국 사람으로서는 제일 먼저 기술를 터득한 분이라 삼천포 양복계에서는 신화적인 분이셨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재봉틀에 앉아 일하시고 또 밤늦게까지 일하시고 일을 마치면 그대로 주무시니 나는 아버지께서 일 외에 하시는 일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곧이어 방학이 되자 ‘여름방학’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 책에 주사위 놀이판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랑 형이랑 주사위 놀이를 하고 놀라고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가위를 가지고 육각형 주사위 구슬을 만들어 주셨고, 또 칼로 내 연필도 깎아 주시고 했다.

 아버지는 왜정 때는 신사 양복 한 벌 만들어 주면 쌀 한 가마니를 받았다고 했다.

 요즈음이야 쌀 한 가마니가 별것 아니지만 1950년 초 즈음에는 초등학교 선생들의 월급이 쌀 두 말값이니 쌀 한 가마니는 얼마나 큰 액수였는지 어림잡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한국 사람들은 쌀을 하찮게 여기는데 만약에 우리나라가 1950년 이전처럼 쌀 수입을 하지않는다면 지금 쌀밥 먹는 사람은 드물어 진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아버지는 1952년 같은 때의 어느 날 부산에 출장 가셨다가 며칠 후 나랑 형이 자고 있는 밤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때 자고 있는 두 아들을 깨워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학원’이라는 제목의 잡지였다 그 당시 잡지책 학원은 중고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로서 한국 역사상 최고의 학생 교양 잡지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학생 잡지로써 학원만 한 내용과 인기를 얻은 잡지는 없을 정도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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