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3:48 (일)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3.12.04 2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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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3)
 큰 외갓집은 대문 앞 큰 감나무가 있었고 집 위채는 마루와 방이 두 칸이고 아래채는 방 하나와 대청마루가 있었으며 그 뒤로는 똥오줌으로 채워져 있는 넓은 화장실이 있는 뒷간이 있는데, 나는 이곳에서 통나무에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볼 적에는 목숨을 걸기도 하였다.

 뒷간에는 화장실뿐 아니라 밭에 뿌린 거름도 쌓아놓고 있었다. 또 그 옆에는 곶감을 해먹는 연시 감나무도 한 그루 있었다.

 마당의 안쪽에는 소를 먹이는 마구간이 있었고, 마구간 뒤 남새밭에는 늘 소풀(정구지)이며 오이나 가지 같은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또 대문 밖에는 넓은 타작마당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추수 때 타작기 두 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면서 벼 짚단의 이삭을 추려 내기도 했고, 어떤 때는 깨나무나 콩나무를 깔아 놓고 도리깨로 타작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추수 때가 아니면 동네 아이들이 여기서 모여 자치기를 하면서 놀았다.

 타작마당 밑에 있는 문전옥답에는 겨울이면 황새들이 몰려와 논고동을 골라 잡아먹기도 했다. 제삿날이 되면 여자 어른들은 아궁이에서 재를 꺼내 대낮부터 제사에 쓸 놋그릇을 반짝반짝 닦아 놓고는 했다.

 이렇게, 우리 큰 외갓집은 어느 구석을 보아도 하나도 궁색함이 없는 부농이었다.

 큰 외갓집 식구 중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외할머니는 삼천포 우리 집에 귀한 손님으로 오셨다 가시던 기억이 남아 있고, 20대 젊은 나이에 폐병을 앓던 갑희 누나는 파리한 얼굴로 외갓집 대문 앞에서 물끄러미 군호 초입의 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나에게 남아 있지만, 두 분은 내 유년 시절에 일찍 천국으로 떠나셨다.

 또 큰 외갓집 장자인 갑동이 형은 빛나는 고교 시절에 부잣집 외동딸을 신부로 맞이해 큰 외갓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은 보았지만, 형이 대학 시절과 직장 생활로 부산에 살아서 내가 외갓집에 드나들 적에는 모습을 본 적이 드물었다.

 18살 나이에 시집간 갑순이 누나는 명절 때만 되면 매형과 같이 외갓집에 다녀가곤 하였다. 그렇게 해 외갓집에 남은 식구는 큰 외삼촌, 큰 외숙모, 갑동이 형과 부인인 형수, 동선이 누나, 갑용이 동생, 이렇게 다섯 사람이 나를 반기고는 했다.

 외갓집 윗채 마루 처마에는 해마다 제비가 집을 지어 새끼를 키우고 있었고, 또 마루 벽 위에는 동선이 누나가 초등학교를 6년 동안 다니면서 받은 개근상과 우등상장을 한 줄로 쭉 걸어 놓았고, 동생 갑용이도 누나에게 지지 않을 세라 개근상과 우등상장을 쭉 걸어 놓았다.

 공부보다는 놀기 좋아하던 개구쟁이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 그들이 정말 슈퍼맨 같이 느껴지곤 하면서 내 기가 꺾이고는 하였다.

 외갓집의 숙모나 숙부들은 어린 손님 나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우대하는 귀한 말을 쓰시곤 하였다.

 표현을 해본다면 이리 오시게(이리 오너라), 진지 잡수셨는가(밥 먹었는가), 잘 주무셨는가(잘 잤나) 식이다. 이런 말을 듣는 나는 갑자기 귀공자가 된 기분이 들고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곤 하였다.

 한술 더 떠서 머리에 기름을 곱게 바르고, 한복을 날아갈 듯 우아하게 입은 곱디고운 새아씨, 갑동이 형 부인인 형수님은 어린 시동생에게 “도련님. 도련님 이렇게 하소. 저렇게 하소. 무엇이 필요하오” 등 윗사람에게 쓰는 존댓말을 하면서 어린 시동생들에게 수발을 들 적에는 내 기분은 하늘에 나는 듯 좋아지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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