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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3.11.27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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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8)
 손님들이 우리 집 방안에 들어와서는 방에서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울상인 나를 보고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모두 “부진아 고생한다. 뭐 사먹어라” 혹은 “공책 사라”하면서 제일 적은 돈 보다 한 단계 위의 화폐단위인 지폐를 한 장씩 꺼내 나에게 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500원 가치를 지닌 화폐를 한 장씩 줬다고나 할까. 그게 15장이 넘어서니 지금 돈의 가치로 1만 원쯤 된 것 같았다. 지금 아이들이야 1~2만 원을 우습게 생각하지만 그 옛날 나라가 극도로 가난해 아이들은 구멍가게에 가서 껌 한통이 아니라 한 개비를 사먹는 다던가 알사탕을 한 알을 사 먹는가 하는 시절에 사탕 알이 백 개쯤 들어있는 봉지를 서너개 살 돈이니 또래 아이들은 감히 구경도 못할 정말 큰 돈이었다.

 그때 나는 팔은 아파 쩔쩔 매면서도 기뻤다. 그것은 고생은 많이 되지만 뭉치 돈을 챙겼으니 그것으로 큰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 10년 생전에 그렇게 많은 돈은 처음 만져 보았는데 문제는 결국 그 많은 돈이 어머니 주머니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내가 조금 써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약간 아쉽다.

 14. 홍길동전 이야기

 요즈음은 홍길동하면 허균의 홍길동 이야기가 떠올려지지만 1950년 전후는 홍길동 하면 재주를 부리고 신출귀몰하며 축지법도 써고 그야말로 생(生)과 사(死)를 오가는 영적인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는 재주가 좋은 사람을 ‘홍길동 재주’라고 하고는 했다. 그만큼 홍길동이라는 단어는 인기어였다.

 그러나 월간 잡지 ‘학원’에서 이조시대 소설가 허균의 작품 홍길동이 본격적으로 소개 되면서 홍길동의 신비감은 떨어지고 말았다. 즉 재주꾼의 이미지가 퇴색되고 그 이후 허균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한 홍길동 이야기가 주로 잡지나 만화 그리고 만화 영화 등으로 제작 되어 와서 그 신비감을 깨트린 것이 아쉽기만 하다.

 장소를 삼천포로 돌려보자. 1951년 무렵 경남 삼천포의 장날이 되면 삼천포 인근의 하이면, 남양면, 서포, 또 바다건너 적은 섬들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삼천포 읍내로 모인다.

 이때 삼천포 읍내는 동쪽 시장과 서쪽 시장은 물론이고 읍내 거리까지 온통 흰 두루마리와 치마저고리를 입은 촌사람들로 복적 거리고는 하였다.

 거리에는 동동 구리무 장사, 호랑이 껍질을 깔아 놓고 껍질에 묻은 살점이나 발톱 등을 파는 장사치, 야바이꾼들이 모였다. 여기에 새로 점치는 사람들, 남의 호주머니 돈을 자기호주머니로 옮겨 넣으려는 목적으로 수작이나 술수를 부리는 별에 별 장사꾼들이 다 모이곤 했다.

 8~9살 때 호기심이 많은 나는 심천포 장날만 되면 괜히 신이 났다. 장날만 되면 시장까지 가지 않아도 볼거리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장날 나는 거리에 좌판을 펼쳐놓은 장사꾼들을 하나하나 점검해 가다가 눈에 번쩍 들어오는 좌판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책을 20여 권 깔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좌판이었다.

 1945년 해방 무렵 서점이나 이후 책방 대여점이 부족했던 그 시절이기도 했는데 출판사에서 판매용 책을 만들어서 책을 팔려고 하면 주 판매처가 시장이었고 책들도 시장에서 물건 팔듯 하면서 책등 여러 가지를 팔고는 했다.

 그때 출판 되어 판매되던 책들은 지금의 수집가들이 딱지본이라 하는데 그것은 속된 말이고 정확한 책의 이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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