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周)나라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왕이나 천자 등이 다스리던 강력한 국가로서 의례와 제사 등을 엄숙하고 성대하게 치렀으며 천자, 공신, 제후 등이 자신들의 공적을 기리거나 왕위에 등극, 제후에 책봉(冊封), 전쟁의 승리 등을 기념하기 위해, 또는 천자와 제후, 제후와 제후의 맹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여러 가지 기물ㆍ무기ㆍ도장 등에 그 사실을 써넣는다. 기록물에는 청동이나 철과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과 같은 석재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해서 금석문(金石文)이라 하며 토기나 기와 등에 기록한 것은 명문(銘文)이라 한다.
그 중 선정비(송덕비)는 조선후기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신임 관리를 맞을 때 쇄마전(刷馬錢)이라 해, 관에서 주는 노잣돈 말고도 백성들이 따로 거둬 바치게 하고, 떠날 때는 입비전(立碑錢)이라 해 공덕비를 세우는데 돈을 모았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얼마나 컸을까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백성들을 못살게 학정을 하면서 백성을 위협하거나 자신의 재물을 들여 억지로 선정비를 세우는 예도 있다. 이렇게 해 선정비를 세우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화난 백성들이 선정비를 깨뜨리기도 하였다. 이에 퇴계 이황은 유서에 ‘비석의 폐해’를 지적하며,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따라서 퇴계 선생 이후의 안동에는 비석이 없다.
지방 수령(사또)들의 선정비(공덕비) 건립의 폐단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기록돼 있다. 숙종 45년(1719) 사헌부는 ‘수령의 공덕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하는 조정의 명이 내려졌다’ 영조는 선정비의 폐단을 보고받고 ‘능관(陵官) (능을 지키던 벼슬아치)도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는데, 군수가 무슨 짓을 못 하겠냐’며 개탄했다. 급기야 1789년 정조는 ‘세운 지 30년 이내의 비석은 모두 철거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나라에서 선정비에 대해 이같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선정비 건립이 곧 민폐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지방수령들은 상관에게 뇌물을 주고 환심을 산 후, 백성들을 동원해 자신은 물론 상관의 비석까지 같이 세운다’고 그 폐단을 지적했다.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선정비 건립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현존하는 선정비의 상당수가 조선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농민 항쟁이 많았던 시기인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마구잡이로 세운 비석 중에 특히 선정비(송덕비)의 내용도 모르고 무턱대고 신격화해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다. 이는 역사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는 무지한 소치라고 본다. 몇 년 전 함양군의 ‘사또선정비’를 손괴하는 행위가 있었다. 이유는 악정을 하였다는 것이다. 새로 부임하는 원님의 정보를 얻고는 미리 ‘선정비’를 길목에 세워 선정을 바라는 일도 많았고 역으로 지방 아전들은 비석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백성을 수탈한 적이 많았다.
비석은 어디까지나 기록물인데 이를 사적가치가 있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K문화원에서는 무조건 ‘사또비석’이라고 이에 ‘헌차례’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혼백을 부르는 ‘홀기’를 하고 ‘제례’도 지낸다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비용은 시민들의 혈세를 사용한다 하니 어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나 시행하는지, 보조금 지원처에서도 사적가치와 제례의 대상이 되는지 확인도 없이, 또한 시민의 혈세가 제대로 쓰여 지는지의 지도감독도 없이 행하는 것을 보고 이래도 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