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쉬는 1500년 된 부부유물
살아 숨쉬는 1500년 된 부부유물
  • 임채용 기자
  • 승인 2013.11.1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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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만의 귀환 양산 부부총 전시 들여다보기
▲ 고분은 단순히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아닌 일반민을 보호 감시하는 암묵적 통치의 기능도 있다. 실제로 보면 크고 웅장한 느낌을 지니는 양산 부부총.
가야와 신라문화 합친 이중적 성격 고분
고리자루 큰칼 등 부장유물은 남녀 상징

 양산 부부총은 낙동강의 지류인 양산천 유역에 형성된 넓은 평야지대를 향해 뻗어 내린 능선 정상부를 따라 대형봉토분(大形封土墳)이 나란히 우뚝 솟아있다. 이러한 북정동 고분군의 입지 양상은 가야지역의 일반적인 수장급 고분군과 매우 유사하다.

 창녕, 고령, 함안 등의 가야의 수장묘는 구릉의 정상부나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서 중심지를 조망하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고분이 단순한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아니라 일반민을 보호 감시하는 암묵적 통치의 기능도 내재하고 있다.

 한편 양산은 지리적으로 가야와 매우 인접해 있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양산지역의 신라 고분들은 구릉의 정상부나 경사면에 분포하는 등 가야문화적 요소를 닮고 있다. 그러나 조사된 유구와 유물은 신라문화에 가깝다. 이러한 고분문화의 이중적인 성격으로 인해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되기도 한다.

 일제는 지난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우선시 했던 것 중의 하나가 그들의 사상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역사적 배경에서 찾고자 했고 조선의 고유문화를 장악하기 위해 고적조사 역시 진행됐던 것이다.

▲ 백 년 만의 귀향 부부총 전시실 내부.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의 일부를 지배했다는 학설에 대한 학문적 뒷받침이 될 만한 증거를 찾고자 가야지역 고분 발굴에 주력했으며, 대부분의 고분조사는 발굴이라는 명목하에 파헤쳐졌다. 그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우리의 품을 떠나 반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무작위로 파헤쳐진 고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확증할만한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고, 유물에 대한 약탈만이 있을 뿐이었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특히 식민통치의 문화적 성격을 과시하기 위한 일환으로 해마다 보고서를 간행하며 식민통치의 문화적 면모를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순수한 학술연구가 아닌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조사내용의 결과에 대한 정확한 보고가 거의 없고 발굴조사와 관련된 활동내용, 일지, 보고서 정도에 그치고 있어 그 피해는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으로 남게 됐다.

 1920년 양산지역 고적조사의 주목적이 고분발굴이었음은 보고서에도 명기된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양산시 북정동 산에 위치한 이 고분을 신라의 무덤으로 유물이 풍부할 것으로 추정해 처음 유물 수집을 목적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산지역의 고분 중 왜 북정동 고분군을 선택했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었으나 발굴자인 오가와케이기치는 당시 18개의 고분 중 부부총이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어 축조연대가 그 중간쯤일 것으로 생각해 발굴했다고 전한다. 지난 1920년 11월 13일 발굴이 시작돼 11월 25일까지 13일간 발굴됐으며, 1927년 ‘고적조사특별보고’가 간행돼 발굴기록을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볼 수가 있었다.

▲ 부부총 내부 실측도.
 발굴기록을 살펴보면 양산 부부총 발굴조사는 단 1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석실 내의 유물을 빠른 시간 내에 꺼내는 데 집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은 1938년 3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도쿄제실박물관(도쿄국립박물관 전신)으로 기증됐으며, 1958년 개최된 제4차 국교정상화회담에서는 문화재 반환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양산 부부총 출토품을 되돌려 받을 기회가 한 차례 있었으나, 일본국립박물관에 진열하겠다는 일본 측의 요구를 들어 결국 반환이 보류됐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 1500년 전의 무덤주인은 아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들을 부부일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무덤에서 확인되는 유물의 성격을 통해 추정하는 것이다. 가령 부부총에는 자루 끝에 둥근 세 개의 환을 붙여 만든 삼루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된다. 기록에 따르면 고리자루큰칼은 2세기쯤 널리 퍼져 무기로 쓰였으며, 유물이 출토된 위치나 성격으로 볼 때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것 같다. 부부총에서 출토된 삼루고리자루큰칼 역시 남성의 유품으로 보인다. 귀걸이 또한 가는 것과 굵은 것이 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대체로 가는 것은 남성이, 굵은 것은 여성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이 확인된다. 이러한 부장유물의 성격으로 볼 때 남녀임은 확실하고, 부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금동말안장.
 한편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다. 유물의 성격에 비춰 당시 양산 일대에서 중앙과 연계된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갖춘 인물의 묘로 추정하면서 당시 삽량 도독인 김서현 장군 부부의 묘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김서현의 사위가 산성의 성주로서 백제군과 대치 중 전사해 이곳에 묻혔다는 설도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다만 부장유물을 통해 ‘무덤 주인의 신분’은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허리띠꾸미개는 금제, 은제, 금동제로 나뉘는데 착용했던 사람의 지위를 반영한다. 금제는 왕족 이상이 착용할 수 있으며 이들은 은제와 금제도 소유한다. 금동제와 은제는 그 아래의 지배층들이 쓴 것으로 판단된다.

 부부총에서는 은제 허리띠꾸미개 2점이 출토됐는데 같은 시기 경주의 신라귀족 혹은 왕급 무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주인공은 고대 신라의 중앙(경주)과 연계된 양산지방을 통솔하는 수장의 것이나 단순한 수장 이전에 거대한 정치적 세력을 가진 지방 군주임이 분명하다.

 부부총은 봉토(지상 위로 흙을 쌓아올린 부분)의 크기가 지름 23m, 높이 3m인 원형의 봉토분이다. 부부총의 중심이 되는 돌방(石室)은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해 길이와 너비, 높이가 각각 5.49m×2.7m×2.58m인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무덤의 출입구는 서쪽 방향으로 뚫었고, 나머지 동ㆍ남ㆍ북벽은 깬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렸다. 서쪽의 입구에는 양옆에 돌을 쌓고 중앙 부분을 입구로 사용했는데, 발굴 당시에 입구는 돌로 막혀있었다.

▲ 부인용 곡옥목걸이.
 시신이 놓이는 부분에는 높이 80㎝ 정도의 주검받침(屍床臺)를 만들었는데, 주검받침은 2차에 걸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주인의 시신이 놓일 부분은 80㎝로 쌓고 반대편은 30㎝ 정도 낮게 조성했으나 후에 부인이 죽고 부인을 추가로 매장하는 과정에서 낮게 조성한 받침 부분을 주인이 놓인 부분과 동일한 높이까지 높여 나란하게 안치할 수 있게 조정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주검받침의 밑에 안치된 3구의 시신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자세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한 관계로 정확한 매장경위를 파악하기 힘들다.

 부부총에서 출토된 유물은 크게 남편 주변에서 출토된 것과 부인 주변에서 출토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남편의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은 금동관(金銅冠), 관모(冠帽), 관식(冠飾)을 비롯해 가는고리귀걸이(細環耳飾), 곡옥목걸이, 금동신발(飾履)과 세잎둥근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 등이 있으며 부인의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은 자작나무로 만든 관모(冠帽)와 은제관식(銀製冠飾), 금제ㆍ은제ㆍ유리제 팔찌, 은제허리띠와 허리띠드리개(腰佩), 철제가위 등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유물은 부인용 곡옥 목걸이이다. 이 목걸이는 중앙에 붉은 마노로 만든 곡옥을 달고, 수정, 치옥(梔玉), 순금, 청색유리 등 각종 보석을 매달아 치장했다. 반면 남편의 가슴 부근에서 발견된 목걸이는 가운데 커다란 비취 곡옥을 달고 나머지를 푸른색 소옥으로 매달았다. 남편의 목걸이가 다소 단순하고 육중한 느낌을 준다면, 부인의 목걸이는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받는다. 이 목걸이는 먼저 사별한 남편이 슬퍼할 부인에게 주는 애틋한 마음이 담긴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 주인용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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