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13:47 (일)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3.11.11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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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7)
 5. 큰집 이야기

 우리 집은 사실상 두 곳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형제가 사는 우리 집과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삼촌들이 사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은 우리가 큰집이라고 부르는 집이었다.

 큰 집은 한내다리 옆의 삼천포 문화원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나오는데 언덕의 골목 사거리에서 사거리 건너가기 전 바로 왼쪽 아래 집이었다.

 처음에는 넓은 한마당에 두 채의 집이 같이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한쪽 집은 남에게 팔아버리고 마당에 반으로 벽을 싸고 한집이 두집으로 나눠져 살았다.

 할머니 집은 벌리뜰에 논이 일곱 마지기가 있고 각산 밑에 400평짜리 밭이 있고 각산 허리에 자그만한 밭도 있어 큰 부자는 아니지만 동네에서 따뜻한 집이라고들 했다.

 할머니 식구들이 사는 집은 방이 세 개 있는데 제일 큰방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고 옆방에는 막내 인천이 삼촌과 그 위 인준이 삼촌이 사시고 뒷방에는 군에서 갓 제대한 인주 삼촌이 기거했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적에는 집 앞의 양조장에 다니셨는데 은퇴하시고는 집안에서 농사일만 돌보았다. 할머니는 농사를 지으시고 또 집안에서 돼지를 키워 동네에서는 돼지 할머니라고 하면 금방 알아 듣는 편이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그 집 식구들이 형제라면 서로 얼굴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지만 할머니 집에 사시는 세 분의 삼촌은 서로가 너무 다르게 태어나고 또 너무나 다르게 살았다.

 막내 인천이 삼촌은 정서적이고 모범생이시고 중간 인준이 삼촌은 삼천포 시내에서 제일 맘이 착하신 분시고 위의 인주 삼촌은 삼천포 시내에서 제일 과격한 분이었다. 그러니 삼촌 삼형제가 달라도 정말 너무나 다른 경우였다.

 모범생 막내 인천이 삼촌은 얼굴도 고우시고 마음씨도 선하시고 정서적이며 나만 보면 늘 웃으시고 반갑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인천이 삼촌은 집안에 화단을 만들고 선인장이며 봉선화며 또 내가 이름도 모르는 꽃들을 키우시고는 했는데 대문 앞과 화장실 앞에 무화과 나무를 두 그루 심은 것이 어느덧 몇년이 되지도 않았는데 주렁주렁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무화과는 이른 여름에 열기 시작하여 늦은 여름까지 따먹어도 계속 열려 나는 여름 한철은 무화과를 실컷 따먹을 수 있었다.

 인천이 삼촌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대학까지 공부도 하고 파월 장교로 월남 전쟁 참전도 하고 또 같은 동네에 살았던 박영수 선생을 웃어른으로 모시고 잘 따랐다.

 박영수 선생은 우리나라 치안국장, 부산시장, 서울시장, 그리고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까지 지내신 분이었다.

 인천이 삼촌은 군대 제대하신후 부산에 내려가서 부산의 민간단체와 정당의 원만한 감투는 다 쓰시면서 사회 단체 활동가로 활동했고 아직도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가운데 인준이 삼촌은 세상에서 마음씨가 제일 고와 평생 남에게 짜증이나 싫은 소리를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분이었다.

 너무나 마음씨가 고와서 그런지 남들은 인준이 삼촌더러 “팔푼이”라고 불렀다. 남들하고 노는 것보다는 혼자놀기를 좋아했는데 혼자서 벽에 그림을 그려놓고 “철수야, 영희야 내 총 받아라! 탕! 탕!”하고 총소리를 내면서 노는 분이었다.

 그런 장면을 다른 동네에 사시는 경애 고모 신랑은 보시고는 그 흉내를 내시고는 했다. 약간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분이었기에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인준이 삼촌은 어디서 구했는지 라디오를 하나 가지고는 한번씩 뜯어 놓고 다시 고치고는 했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는 영리한 사람도 하지 못하는 라디오 수리를 척척 하시는 걸 보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 인준이 삼촌은 살아 생전 남에게 존대말를 들어 본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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