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만주족)가 압록강을 넘어 남한산성까지 침입하는 길목은 주로 북한지역인데 필자는 남북역사학회 모임이 있어 평양, 개성, 금강산 등에서 북한 학자에게 병자호란 당시의 충신에게 제향과 축제가 있는지 물어보니 묵묵부답이었다. 또한 지난해는 청 태종 당시의 수도인 중국 요령성 심양까지 답사해 사료, 의상, 무기 등 고증을 했다. 그러니 남ㆍ북한을 통틀어 병자호란 당시의 충신을 제향하고 축제한다는 곳이 경남이 최초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하다.
병자호란 때 충신들의 제향을 살펴보니, 창원에서는 백선남 부사 휘하에 충신 황시헌은 300여 근왕병을 모아 출발했다. 1637년 1월 2일에 경기도 광주 쌍령산에 도착해 다른 부대와 합류했다. 황시헌은 ‘부리(府吏: 수령의 수행비서)’라는 낮은 직급으로 부사를 수행하는 역할을 했으며, 전쟁 중에 그는 ‘창원 군사들은 내 깃발 아래 모여라’고 외쳤다. 100여 명이 모였고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부사 백선남이 창에 찔려 쓰러지면서 황시헌에게 관직의 증표인 ‘부인(府印)’을 건네주고 숨졌다. 그러자 청군이 달려와 부인을 갖고 있는 그의 팔을 베어버렸다. 두 팔이 잘린 그는 입에 부인을 물고 버텼다. 결국 청은 그의 목까지 자르고 ‘부인(府印)’을 탈취해 갔다. 이같이 장렬한 죽음을 당한 황시헌 부리의 충절을 재현하는 것이 ‘문창제 놀이’이다. 그 후 음력 1월 3일이면 창원부사가 직접 제례를 주도했다. 그러고 나면 관기와 관노들이 춤을 추고 당시 순절 장면을 재현했다. 일제강점기 들어 단절됐던 ‘문창제 놀이’는 1974년 복원작업이 시작되었고 이번에 이를 승화시켜 대축제를 하게 된다.
이 외에도 경주 용산서원에서는 최진립 충신을 제향하고 있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당하자,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가 왕의 밀지를 받고 근왕(勤王)을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향하면서 다른 장수에게 대신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이어서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老者雖不能戰獨不能死耶)’라고 말한 뒤 분연히 싸우다 전사했다.
철원군은 충렬사(忠烈祠)지어 추모제향을 거행 하는데 평안도관찰사 홍명구와 병마절도사 유림(柳琳)이 이끈 5천 군대는 1637년 1월 28 금화 백전전투에서 네 차례 접전 끝에 청의 기병을 제압하고 적장까지 사살했던 곳으로 두 충신을 기리고 있다. 남한산성 현절사에서도 제향을 하는데 1636년 12월 15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이때 항복을 거절한 삼학사(홍익한, 오달제, 윤집)는 용골대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자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협박 끝에 처형당했다. 따라서 대축제도 좋지마는 이번 경남의 정충문화진흥회(사단법인)에서 주관하는 바와 같이 최근 국사를 중요시하는 마당에 조국을 위하는 충효정신을 재삼 강조하는 범국가적 축제가 계속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