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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투` 기적 김해서 부활한다
`낙동강 전투` 기적 김해서 부활한다
  • 김현철 기자
  • 승인 2013.06.04 0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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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중순 추진사업단 창설
청소년 회의ㆍ학술대회 개최, 탑 재건ㆍ참전 기념일 추진

1981년 양화대교 확장공사 때 철거된`UN군 자유ㆍ수호참전기념탑` 재건 준비
"UN군 참전은 서울 아닌 경남이 처음"

 6ㆍ25전쟁 당시 최후방어선 역할을 담당했던 낙동강 전투. 1950년 7월 말께 북한군은 전차와 강력한 화력을 앞세우고 기습, 전쟁발발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진격, 대구와 부산을 잇는 대동맥을 끊으려 압박했다. 당시 미 8군의 워커장군의 지시로 UN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사수했다. 이때 수많은 UN군과 한국군이 이곳에서 목숨으로 자유를 지켜냈다. 이 방어선을 일컬어`워크라인` 즉 낙동강 최후 방어전선이라고 칭한다. 휴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6월 25일 UN가입국의 지원과 국민의 성금을 모아 수도 서울의 관문인 `한강`변에 `유엔군 자유수호참전기념탑`을 건립, 제막하고 세계평화를 다짐했다. 기념탑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 번영의 기틀을 닦는데 초석이 됐다. 하지만 88서울 올림픽 개최 등의 이유로 1981년 5월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확장 공사로 인해 형체도 알 수 없이 부셔져 철거됐고, 이후 당시 경제적 상황이 맞지 않아 재건사업이 무기한 보류돼 오늘에 이르렀다. 편집자 주

▲ 1981년 5월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확장 공사 전 `UN군 자유ㆍ수호 참전기념탑` 모습. 당시 88서울 올림픽 개최 등의 이유로 기념탑이 철거됐다.

 김해지역 청년들이 모여 낙동강의 기적을 이룩한 `UN군 자유ㆍ수호 참전기념탑` 재건 사업이 추진돼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달 24일 한국전쟁 정전 협정 60주년을 맞아 국제연합(UN)군의 숭고한 희생과 평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뜻 있는 김해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사)유엔참전국문화교류연맹 산하 비회원으로 구성된 가칭 `UN군 자유수호 참전 기념탑 재건을 위한 추진사업단 발기인대회 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 회원들이다.

▲ 국제연합군의 숭고한 희생과 평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달 24일 가칭 `UN군 자유수호 참전 기념탑 재건 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날 준비위는 6ㆍ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최초 UN군의 참전이 이뤄진 곳은 수도 서울이 아닌 경남도 일대였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주장하며 지금껏 지정되지 못한 UN군 참전기념일 지정건과 함께 기념탑 재건을 추진하는데 뜻을 모았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3년, 휴전협정 60주년이 되는 호국보훈의 해이다.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무력 침략한 북한군은 그 해 7월 말 낙동강에 도하했고 대구와 부산을 잇는 대동맥을 끊으려 압박했다.

 이때 미 8군의 워커장군의 지시로 UN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천혜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목숨으로 이곳을 지켜냈다.

 국토의 대부분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고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에 놓인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UN군으로는 가장 먼저 참전한 미국군 그리고 영국군과 함께 왜관에서 마산까지 낙동강 남-북 전선을 방어함으로써 UN참전군이 안전하게 상륙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국군과 UN군의 북진할 계기를 마련하고 이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이후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낙동강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피로서 저항한 경남도민과 UN군이 없었더라면 결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UN군은 당시 물자수송의 유일한 항구였던 부산항에 도착했고 부산과 경남을 잇는 관문 김해를 통해 낙동강전선에 참전했다.

 사)유엔참전국문화교류연맹 김두건 이사장은 "경남일대의 낙동강방어는 UN군이 맡았고, 왜관의 동북부 산악지대 방어는 한국군이 담당했다"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 작전 개시와 더불어 UN군의 총반격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대한민국의 자유와 주권을 회복하고 조국을 수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한국군이 담당한 낙동강 동북부 지역인 경북과 당시 물자수송의 유일한 항구였던 부산에 비해 UN군과 경남도민들이 함께 피로서 사수한 경남일대의 낙동강방어 전투사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특히 3년 전 정부는 6ㆍ25, 60주년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전투를 기념하고자 `낙동강호국평화벨트사업`을 시행했다.

 경북지역의 격전지였던 왜관과 다부동지역 등에 지난 2010부터 2015년까지 6년간 무려 1천500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해 매년 기념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이와는 관계없이 부산은 임시정부 설치를 기념하고 당시 경남도청 자리의 정부 청사와 도지사 관사를 이승만대통령 관저로 사용한 내용, 그리고 국회가 된 부산극장과 영도다리, 국제시장, 40계단 등 6ㆍ25로 인해 생긴 곳을 조명하고 있다.

 또 부산 남구의 유엔기념공원을 매체로 UN의 날을 지정해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진행하며 참전21개국에 대해 감사와 은혜의 마음을 전하면서 연평도포격 사건과 천안함 침몰과 같은 참사를 잊지 말자는 반공 인식을 새로이 하고 있다.

 반면 경남지역은 국제연합(UN)기구의 창설 이래 최초로 참전한 세계사적인 전사역사를 가진 지역이면서도 그 것을 제대로 조명 하지도 받지도 못하고,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고 있다.

 김 이사장은 "부산의 유엔기념공원은 UN군 전사자 영령을 모신 평화의 성지이며 경남지역은 UN군이 공산괴뢰집단과 맞서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켜낸 최초의 격전지 이면서 또한 UN이 최초로 세계평화에 기여한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라며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는 물론, 부산의 유엔기념공원 이상의 국제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 경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김해인이 무려 1천39명이 된다"면서 "이는 전사자를 대비해 통상적인 방법으로 추정하면 전사자는 3배 수 정도인 3천117명에 육박할 것이다. 김해는 지금도 경남과 부산을 잇는 관문 역할을 하는 소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중심 지역"이라며 "김해에 `유엔군 자유수호참전기념탑`을 재건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수도 서울의 관문인 한강변에 `유엔군 자유수호참전기념탑`을 건립, 제막한 것은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며 "그러나 88서울 올림픽 개최 등의 이유로 1981년 5월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확장 공사로 인해 형체도 알 수 없이 부셔져 철거돼 UN군 참전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어 준비위를 발족하게 됐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 철거 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모습.
 준비위는 앞으로 `UN군 자유수호참전기념탑 재건 추진을 위해 UN군 참전용사 초청 교류, 주한미군 부대 방문, 경남지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UN참전국모의회의, 토론대회 같은 학술대회와 UN군 역사 체험학습활동을 시작 할 예정이다.

 앞서 김해에 본부를 두고 있는 사)유엔참전국문화교류연맹은 2010년 9월 18일 한국전쟁 당시 UN군으로 참전한 필리핀 `휘델 라모스` 전 대통령과 참전용사단 등 그 가족 40여 명을 국빈자격으로 김해로 초청했다.

 휘델 라모스 대통령 일행은 김해에 거주하는 필리핀 다문화가정과 근로자 30여 명을 함께 경남의 청소년들과 김수로왕릉을 체험하고 오찬과 다과를 나누며 한ㆍ필 양국간의 우호를 다지는 기회를 마련했다.

 또 필리핀 국방차관과 민정차관을 차례로 김해로 초청해 한국의 전통과 493년 전통의 가야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 이사장는 "6월 중순께 `UN군 자유ㆍ수호참전기념탑 재건을 위한 추진사업단 창설을 위해 먼저 추진사업단 발기인 대회를 준비 중"이라며 "이후 관련 UN한국 참전국 협회 지갑종 회장과 UN참전 21개국 주한 대사관의 협조와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행보에 나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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