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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134>
제9화 슬픈 회상 <134>
  • 서휘산
  • 승인 2013.05.09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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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10)
“그 어느 것에도 연연하지 않고 사는 것도 괜찮지만 자넬 필요로 하는 곳,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사는 것도 아름다운 삶일세.”

 “인내를 가지란 말이다, 이 자식아.”

 “알겠습니다. 청장님.”

 “아까 주지시킨 대로, 놈이 머리를 깎고 그대로 절에 눌러앉아 버린다면 굳이 죽일 이유는 없다.”

 “만일 절을 이탈하면…….”

 “그 땐 그 때 가서 판단하겠다. 그러니 철저히 감시하고 수시로 보고해. 알아들었어?”

 “예, 청장님.”

 휴대폰을 접은 나팔호가 책상에 몸을 기대고 내뱉었다.

 “잠잠하던 세상이 그 새끼만 나타나면 시끄럽구만. 에이 씨.”

 # “제발…….”

 긴 침묵을 깨고 내놓은 백지한의 절규에 가까운 애원이다. 그러나 그 애원을 영봉은 단칼에 잘라버린다.

 “불의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고, 정의를 보고도 호응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행동은 중도의 도리가 아닐세.”

 백지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젠 과거에 매달려 좀스럽게 살고 싶지 않아서 그래.”

 “……?”

 “나도 자네처럼 툭 터진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고 싶단 얘길세. 마치 허공과도 같이.”

 “……!”

 “그러니 제발 날 더 이상 아수라판에 집어넣지 말게나. 많은 죄는 서리와 이슬 같아서, 지혜와 용서의 태양으로 능히 녹여 없앨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나는 믿네.”

 “……!”

 순간 영봉의 눈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백지한의 의지에 잔잔한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는 두 눈에 탄성의 빛을 유지하며 허리를 굽혔다.

 “자넨 드디어 성불했구만.”

 “당치도 않은 소리, 성불이라니……. 어쨌거나 이젠 머릴 깎아주겠나?”

 “알겠네. 기꺼이 그리 하겠네.”

 “고맙네.”

 백지한의 눈가에 물기가 비쳤다.

 “허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또 뭔가?”

 백지한이 답답하게 물었다.

 “어린 영혼을 달래주게.”

 “수련이 말인가?”

 “안쓰러워 볼 수가 없네.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자네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어얄 것 아닌가?”

 “알았네. 그건 아까 내 이미 약속한 바 아니던가.”

 “그래, 그리 하게나. 허공처럼 그 어느 것에도 연연하지 않고 사는 것도 괜찮지만 자넬 필요로 하는 곳,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사는 것도 아름다운 삶일세.”

 “…….”

 말없는 백지한을 영봉이 지긋이 건너다보았다.

 “수련화가 수긍하면 그 때 오게. 그럼 기꺼이, 내 자네 머릴 영광스런 마음을 깎아 드리겠네.”

 “이 사람 참 거창하긴……. 민망하네.”

 두터운 구름을 뚫고 나온 보름달을 바라보듯 두 사람의 미소가 교차했다. 그리고 침묵이 시작됐다. 그 침묵은 길었다. 영봉의 눈이 벽시계로 갔다.

 “이런! 벌써 열두시가 넘었군.”

 “주무시게.”

 “자넨?”

 “책 좀 더 보다가 자겠네.”

 “피곤할 텐데…….”

 “잠이 쉬 올 것 같지 않아.”

 “그럼 그리 하게.”

 대답 끝에 영봉은 그 자리에 앉은 채 금방 잠 속으로 빠져버렸다.

 백지한은 잠든 영봉의 그 고요한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 시기에 승려가 해야할 일은 철저한 중생심의 실천에 있다며, 자신의 일생을 소외된 이웃에 헌신하가로 한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

 “저 얼굴……”

 저절로 떠오른 존경의 미소가 백지한의 입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튿날 오후.

 도서관은 학생들로 붐볐다. 급격히 떨어진 국가신인도와 경기침체, 그에 따른 재벌과 기업들의 구조조정의 여파로 대학졸업생들의 취업문이 바늘구멍만이나 해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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