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9:46 (토)
제9화 슬픈 회상 <131>
제9화 슬픈 회상 <131>
  • 서휘산
  • 승인 2013.05.06 23: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9화 슬픈 회상 (7)
“도대체 한국의 불교를 바로 잡겠다고 하는 그대가! 날더러 지금 모든 악의 근본인 애욕에 빠지라고 유혹하고 있는 겐가?”

 “그 아이의 감정이 부녀의 정이 아닌 부부의 정이던가?”

 “그렇네. 그러니 이참에 마음을 정하게나.”

 “어허, 이 친구.”

 백지한이 영봉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애욕이란 악의 빛이요, 먹구름에 밀려오는 폭풍우란 걸 몰라서 하는 소린가?”

 “…….”

 영봉이 대답하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밤안개처럼 흘러갔다. 이윽고 침묵을 깬 백지한의 목소리는 간곡해져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자의 그 화려한 지위를 버리고 처와 자식까지 버렸다는 걸 스님은 잊었는가?”

 “그 때 부처님이 처자를 버린 것은 당시의 인연이 그리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네.”

 “……?”

 “세상의 모든 일은 인연 따라 가는 것이거늘.”

 백지한이 어두운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그 인연이라는 것도 잠시잠시 모였다가 또 금방 흩어져버리는 무상한 것. 그런데도 굳이 그것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는가?”

 “……?”

 “그리고 모든 번뇌는 부질없는 애욕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스님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터, 그러니 스님이 그 아일 잘 좀 설득해주소.”

 “그러나 사랑보다 이 사바세계를 밝게 하는 것도 없는 것이네.”

 “사랑과 애욕은 다른 것일세.”

 “애욕?”

 “그래, 애욕!”

 “수련화의 사랑을 애욕이라고?”

 “그럼 뭔가?”

 영봉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애욕이라는 흉기를 들고 달려드는 백지한의 공격에 잠시의 명상으로 맞선 것이다. 이윽고 눈을 뜬 영봉은 편안한 자세와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 좋아. 그래 애욕이라 하세. 그러나 설령 애욕이라 해도 자네로 해서 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건 애욕을 떠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야.”

 다시 백지한이 펄펄 끓었다.

 “도대체 한국의 불교를 바로 잡겠다고 하는 그대가! 날더러 지금 모든 악의 근본인 애욕에 빠지라고 유혹하고 있는 겐가?”

 “어허! 애욕이 아니라 사랑이라니깐.”

 목소리를 높였던 영봉이 다시 가라앉혔다.

 “어쨌든 날 믿고 수련화를 만나게. 수련화 없인 자네의 행복도 단지 물거품일세.”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게나.”

 고개를 돌리는 백지한의 얼굴 근육이 씰룩거렸다. 고집스런 모습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영봉이 다시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수련화를 외면하고선 자네의 핍박과 고생은 끊임없이 계속될 거야.”

 “어허, 그만하라니깐!”

 백지한이 거칠게 손을 저었고 드디어 영봉이 폭발했다.

 “자네가 정녕 나의 숙명통(전생의 인연과 업을 아는 지혜)을 의심하려 든단 말인가?”

 영봉의 고요한 눈길은 백지한에게 준엄함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 위엄 앞에 백지한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영봉을 잠시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꽁지를 내렸다.

 “그건 아니네.”

 갈등의 빛이 드리운 백지한의 눈을 영봉이 찌르듯 바라보았다. 기회를 포착한 그는 법력의 힘을 실어 백지한을 공략했다.

 “지금 내가 자네와 수련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하잖은가?”

 “알았네, 그러나.”

 “그러나 또, 뭔가?”

 말을 자르고 묻는 영봉의 눈초리가 벌침처럼 날카로웠다.

 # “일단 내일 또 만나기로는 했는데…….”

 전봉준이 이마에 근심살을 그리며 사발을 들자 이방언이 그 잔을 채웠다. 전통찻집 겸 주점 ‘도투마리’다. 안주로는 김치와 묵, 부침개 그리고 병치 등을 내놓는데 안주 값은 받지 않고 술값만 받아 가난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가게였다.

 “인자 어떻게 해야되냐?”

 전봉준이 사발을 입술에 대고 묻자 이방언이 대쪽을 자르듯 대답했다.

 “어떻게 허긴요. 그양 조져부러야지라.”

 “뭐? 조져?”

 “아 꽃은 꺾는 맛이고 쪼갑지는 까먹는 맛 아니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