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13:03 (금)
제9화 슬픈 회상 <127>
제9화 슬픈 회상 <127>
  • 서휘산
  • 승인 2013.04.29 2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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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3)
백지한이 뉜가? 광야에 우뚝 솟아있는 고독한 봉우리임에 틀림없는 인물이었다.

 “그럼……?”

 “처 천사, 아 아니 후 후배재.”

 “참 선배님도…….”

 수련이 해맑게 웃었고, 그 눈부신 웃음이 햇살처럼 흩어져 전봉준은 차마 눈을 뜨고 있질 못했다. 잠시 후 눈을 든 전봉준이 울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어렵사리 물었다.

 “긍께 만나줄랑가?”

 “저 때문에 천하장사가 망가졌다는 말 듣고 싶지 않은데예.”

 “그기 아니다 했잖여.”

 전봉준이 부리부리한 눈을 끔벅거렸다.

 “…….”

 “하루 한번씩만 만나주더라고.”

 “……?”

 “아주 잠깐씩만이라도.”

 “…….”

 “그러면 내가 한 번도 안 지고 승승장구헐틴디.”

 # 전봉준이 수련을 만나 열정을 쏟아 붓고 백지한이 무궁사로 가고 있는 그 시간, 서울 하이얏트 호텔 1109호 스위트룸에는 50대 초반의 사내가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입을 콱 다물고 있는 그는 작달만한 키에 어깨가 떡 벌어졌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쥐새끼처럼 작은 두 눈에서는 신념인지 살기인지 쉬 분간이 안 되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내 이놈을 요절을 내버려야 편히 살 텐데….’

 전신이 야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는 안기부 제1차장 정일육이다.

 3공 때부터 역대 권력자의 발바닥과 똥구멍까지 핥아가며 이뤄놓은 안기부 제1차장 자리다. 그러나 그 굴욕을 딛고 일단 권력 속으로 진입하자 그때부터는 꿀 같은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은 돈과 권력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청와대를 들락거리는 몇몇 놈들 앞만 아니면 그는 어디를 가나 황제였다. 인기 있는 가수를 마누라로 앉혔고 미스코리아 출신의 아나운서를 첩으로 들였다. 이 시대엔 뭐니뭐니해도 돈이 출세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재벌들을 후려쳐 돈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추종자들을 만들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맘에 드는 유명 여자를 데리고 놀았다.

 정일육은 눈을 감았다.

 ‘아-.’

 가슴 터지도록 즐거운 열락의 나날들…….

 그는 이 권세의 날들을 떠나 보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오늘 새벽 백지한이 출감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후…….’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권세자라 하더라도 그의 약점을 쥐고있는 의로운 자 앞에서는 비열해질 수밖에 없다.

 백지한이 뉜가?

 광야에 우뚝 솟아있는 고독한 봉우리임에 틀림없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무너뜨리려 한들…….

 정일육은 눈을 감고 백지한이 출감해 취할 행동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았다. 누구보다도 권력과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온 백지한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기득권자들의 선봉을 서 그를 파멸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정일육으로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앞날이다.

 자신을 가만둘 리 없는 것이다.

 ‘손을 써야 돼.’

 그의 왼손이 저절로 전화기로 갔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경남지방경찰청장 나팔호의 휴대폰 번호다. 신호가 가고 곧 나팔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 나청장. 나 정일육이요.”

 “아니! 차장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나팔호의 음성이 한 템포 올라갔다. 정일육은 실질적인 그의 대부다. 자신이 지금껏 고속승진을 해온 건 바로 그의 입김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나팔호는 그 정일육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용건을 꺼낸 정일육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안 좋은 소식이요.”

 “예? 무슨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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