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나비의 촛대걸이 공격을 피한 백지한이 다리를 곧게 세우더니 발바닥의 안쪽으로 호랑나비의 목을 후려 찼다.
“쿵!”
“와-.”
경탄소리와 함께 손을 잡고 일어선 호랑나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제가 도인께 가르쳐 드릴 건 없습니다.”
“이 사람 무슨 말을…….”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호랑나비 안홍집의 시선을 부드러웠다. 백지한이 그의 나머지 한 손을 쥐었다.
“그 동안 애썼네.”
“뭘요.”
“정말 고맙네.”
“이제 형님은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이 사람 아부는.”
그러나 백지한의 얼굴은 싫지 않은 표정이다.
“아부가 아닙니다, 도인어른.”
“어쨌든 고마우이. 이 은혜 잊지 않겠네.”
감방 안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느새 바깥엔 익은 가을이 세 번째나 바뀌고 있었다.
백지한은 원기단법을 수련하던 도중 만기 출소일을 맞았다. 단전호흡법을 익히는 동안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린 세월이었다. 가출옥 중 사고라 지난 법 잔여 형기 4개월까지 채운 3년 4개월만의 출옥이었다. 단전호흡은 아직 피부와 코로 병행해서 호흡을 할 수 있는 삼합단법(三合丹法)이 남아 있었다.
백지한은 아쉬웠다. 그러나 원기단법까지 만으로도 백지한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맑아 있었다. 그의 마음은 따뜻했고 있는 그대로의 우주를 관조했다. 그야말로 그는 이제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그래서 생사를 초월하는 도에 이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의 과거에 관심이 없었다. 원망도 복수도…….
해탈한 몸.
탐욕과 욕망에서, 그리고 꿈과 기쁨으로부터, 또 좌절과 슬픔으로부터…….
이제 모든 집착과 충동이 그의 영혼 깊이 잠재워져 그의 의식은 더없이 평온했다.
# 익은 가을, 억새꽃이 간밤의 찬이슬에 흠뻑 젖어있었다.
다른 별은 지고, 아침노을을 기다리며 홀로 남아있는 샛별…….
그 샛별이 빛나고 있는 청주교도소를 나서는 백지한의 얼굴에선 깨달은 자의 맑음과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이 풍겨 나오고 있다.
곱게 익은 단풍 하나가 그의 이마를 치고 땅에 떨어졌다. 입가에 웃음을 띤 백지한은 몸을 굽혀 그 이파리를 주워들었다.
배신에 응어리진 원망, 분노, 복수…….
이 모든 슬픔도 세월에 곰삭으면 꽃을 피운다 했던가.
이제 그의 몸와 마음은 한 송이 맑은 별꽃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 속에 들어온 저 별이 신선하다. 묻혀진 그의 과거를 덮고 다시 소생한 기분인 것이다.
익어 가는 깻내로 구수히 출렁이는 들녘…….
그 들녘을 백지한은 가을바람을 따라가듯 유유히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삼랑진에 있는 천태산 무궁사.
깎아지른 암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절.
‘그곳으로…….’
그의 가슴이 잔잔하게 활력으로 뛴다.
# “인자 나올 때가 됐는디…….”
전봉준이 햇빛으로 반짝이는 407호의 유리창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환상으로 부풀려진 미지의 여인을 기다리는 것은 가슴벅차게 떨리는 일이다.
황홀하게 물든 단풍잎이 가을을 풍미하고 있는 마산의 경남대학교정, 인문학부 강의실인 1호관 앞 단풍나무 아래에서 수련을 기다리고 있는 전봉준의 심장이 지금 막 사춘기를 시작한 소년.소녀의 그것처럼 발랑발랑 뛰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 찬란하고도 황홀한 감정들…….
씨름을 그의 모든 것으로 알고 있던 전봉준에게 새로운 천하, 홍수련이 나타난 것이 어언 반 년.
‘그 천사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밤꽃 향기로 가득한, 고독한 침대 위에 누워 불면의 밤을 지새던 그가 오늘 결국 수련을 만나보리라 결단을 내린 것이다.
1초, 1분, 10분…….
이 길고도 목마르게 하는 기다림의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