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인즉슨, 자신의 고향이 그와 같아서 부모님과 친구들을 만나러 자주 고향에 가서 아는데, 그 시인은 여전히 고향에서 잊혀져 있으니, 다시 한 번 그 시인을 환기시키는 글을 써 주십사, 는 권유를 담은 요청을 삼차에 걸쳐 받았다. 처음엔 몇 가지 이유로 주저했지만, 결국, 쓰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잊혀진 시인을 복권시키는 것은 동도(同道)의 의무라는 그 독자의 압박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만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어무적에 관한 사료는 소략하다. 소략한 사료로 허술하나마 연대기로 어무적의 일생을 재구성해 본다. 시인 어무적은 조선조 세종(재위기간:1418~50)말기쯤 김해에서 태어났다. 호는 낭선(郎仙) 자는 잠부(潛夫)다. 할아버지는 초시에 입격한 생원인 변문(變文), 아버지는 사직(司直)을 지낸 효량(孝良), 어머니는 관비(官婢)출신이다. 훗날 좌의정과 우찬성으로 현달하는 세겸(世謙)ㆍ세공(世恭)형제와는 재종(再從)간.
시인은 성장기까지는 그런대로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첩의 아들이지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았고, 말년까지 지음(知音)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재종인 세겸과는 우애를 쌓았다. 하지만 청년기 어느 시기에, 학문과 시재가 있었지만 출신 때문에 대과를 볼 수가 없었던 그는, 현실과 타협하고 서얼에게 허여된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 되어 고향을 떠나 한성으로 간다.
비록 장악원(掌樂院)소속 미관말직에 불과했지만 그는 학문과 타고난 시재를 인정받아 사신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로는, 시를 쓰며 살기위해 당대 지배구조의 말단에 편입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정착시키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연산군(燕山君)의 등장과 함께 흔들린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파를 숙청한 연산군과 훈구파들의 폭정과 극심해진 가렴주구를 시인이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한 것이다.
시대가 신음하고 식자들이 침묵하는 암흑의 세월에, 그는 연산군에게 분연히 상소를 올린다. 상소에서 그는 연산군에게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설한 뒤, 근본을 바로 세우고 언로를 열고 색을 멀리하고 술을 금하라는 준열한 진언을, 마치 애비가 파락호 아들을 꾸짖듯 훈계한다. 죽음을 각오한 담력이 아니면 결코 올릴 수가 없는 상소였다. 이 격렬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폭군 연산군이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역사의 미스테리라 할만하다.
상소의 여파인 듯 그는 고향 김해에 낙향한다. 하지만 폭정과 가렴주구는 고향도 비켜가지 않는다. 사복(私腹)을 채우기에 급급한 현령은, 매화나무 매실에까지 무리하게 징세하는 수탈을 서슴지 않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나무를 잘라 버린다. 시인은 이런 현실을 시로써 풍자한다. 현령의 미움을 사게 된 그는 후일 중종 반정의 중심인물이 되는 박원종에게 몸을 의탁하려 하나 도중에 병을 얻어 어느 역사(驛舍)에서 생을 마감한다.
사료에 나타난 그의 신상기록을 정리하면 이 정도다. 소략하게 남아 있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결코 복된 삶을 살다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는 후대 문인들에게 높이 평가받아 동문선(東文選)과 국조시산(國朝詩刪)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문인들 저서에도 소개 되고 있어, 그의 삶이 누리지 못한 복(福)을 대신 누린다. 뒷날 그의 시는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 명 말에 편찬된 시선집 명시종(明詩綜)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나 그는 현대에 와서는 까맣게 잊혀 진다. 한문학이나 국문학을 전공하는 소수에게 관심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원인은 5세기라는 기나긴 세월 탓 일 테고, 다음으로는 문자 생활이 달라진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가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 어무적 시보다 네 배나 더 긴 세월과 당시 언어와 현대 언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태리인이 M.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잊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혹자는 저술의 격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은 못났으니 조상을 잊자는 말만큼 씁쓸하게 들린다.
더 씁쓸한 것은 어무적은 고향에서도 완전히 잊혀 졌다는 사실이다. 5년 전 어무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할 때 그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더 알 수 있을까 하여 시청공보실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보실 직원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어무적의 행적에 대해서, 아니 어무적의 이름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어무적의 이름조차 없기는 시 홈 페이지에서도 마차가지였다. 문협 같은 식자층에서도 어무적의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어무적은 고향에서 완벽하게 잊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떨지…….
정작에 필요한 것들은 숨겨져 있는지
아니면 요란스럽게 나타나있는지...
보물은 그래서 더 빛이 나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