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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가야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 김성규
  • 승인 2013.02.24 1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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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성 규 경남도의회 의원
 승자만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일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가려서 갸야만의 역사적인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아쉬움 속에 잠을 자고 있다. 가야는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의 소국에서 발전한 나라로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일정한 정치 세력으로 결집돼 소국단위로 나뉘어 존속했던 이른바 ‘연맹국가’였다.

 이 가야연맹에 속한 나라가 정확히 몇 나라 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유사에는 6개 나라였다고 기록돼 있다.

 가야의 여러 나라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그 일대 곳곳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그리고 오랫동안 가야연맹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나라가 내 고향 김해의 금관가야의 영토였다.

 우리 고대사의 주역이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나라의 모습을 갖춰갈 때만 해도 가야는 삼국과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는 강력한 나라였다. 풍부한 철과 수준 높은 제련기술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철기문화를 꽃피운 명실상부한 철의 왕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여러 각국과의 활발한 해상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와 세련된 문화를 가꿨던 강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비슷한 시기에 발전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는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하지 못한 채 어느 순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그 내력을 포함해 가야의 참모습에 대한 많은 부분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야에 관련된 믿을만한 역사적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은 탓이다.

 이에 금관 가야인들이 김해 곳곳에 남겨놓은 흔적, 즉 유적이 말해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흔적의 시발점인 가야 왕국의 첫 번째 왕인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성한 봉우리인 구지봉을 통해 가야의 기록이 시작된다.

 김해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수로왕릉 그리고, 망망대해를 건너 저 멀리 야유타국에서 온 그의 왕비 허황옥릉…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을 통해 다양성을 받아들인 가야의 열린 사회분위기를 추측해 본다.

 1990년대 이후 4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된 김해의 대성동 고분군은 신비의 왕국 가야의 참모습을 많은 부분 밝혀준 획기적인 유적이다. 대성동 고분군은 금관가야를 다스렸던 지배계층의 무덤이 포함된 집단묘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여기서 발굴된 철제갑옷, 칼, 덩이쇠, 가야 철기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철기유물을 비롯, 토기, 청동거울, 각종 유리제품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모두 문헌이 전해주지 않는 가야사의 미스터리를 상당 부분 해소해주는 소중한 증거가 되고 있다.

 김해에는 그밖에 봉황동 유적지, 예안리 고분군, 구산동 고분군, 김해국립박물관 등 주변 곳곳에 가야의 역사가 아직도 숨 쉬고 있다. 가야는 무려 500년간 존속한 나라다.

 비록 신라에 의해 1천500년 전에 멸망했다고는 하나 가야의 혼은 아직까지 계승되고 있다. 매년 김해지역 큰 행사인 가야문화축제를 통해 가야의 후손인 김해인들은 가야를 잊지 않으며, 늘 주변 곳곳의 가야 유적과 함께 살아 숨 쉬면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역사로 남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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