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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고택 안채 팔작 기와집 원형 그대로 보전
이씨 고택 안채 팔작 기와집 원형 그대로 보전
  • 이명석 기자
  • 승인 2013.01.01 2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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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고택을 거닐다] 3 하동군 전통가옥 8채

김씨 고택, 좌청룡 우백호 들판에 위치 ‘유명’
조씨 고택, 1800년대 중반 16년 걸쳐 건축

 하동군이 지역의 전통주거문화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150년이 넘은 전통가옥 8채를 영구 보존키로 하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하동군이 영구보존키로한 전총가옥은 악양면 5채, 금남면 2채, 북천면 1채, 양보면 1채 등이다.

 △악양면 동매리 김씨 고택
 고풍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는 하동지역의 전통가옥 중 가장 이름이 높은 고장이 악양이다. 나ㆍ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중국의 악양과 그 모습이 같다해 이름 붙였다는 곳이다.
 따라서 중국의 소상팔경과 같이 악양팔경이 존재하며 전체 면의 구성이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온 구자봉(767m)이 이루는 좌청룡과 형제봉(1천115m)이 이루는 우백호로 둘러싸이고 가운데 넓은 악양 들판을 흐르는 악양천이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는 길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악양의 많은 마을들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 동매리이며 이 마을에 ‘김부자집’으로 더 이름난 매강재가 있다.
 의성 김씨가 하동에 온 것은 임난시에 진해현감을 했던 김세량(金世良)이 하동의 흥룡마을에 처음 입항하면서부터이고 그 후손인 승지겸 참찬관을 지낸 김재윤(1855~1937)이 명당터를 찾아 이곳에 정주했다고 대문에 걸린 매강재기에 기록돼 있다.
 그 후 원래의 주거가 쇠락해 노년에 아들들이 힘을 모아 3년3개월 5일동안의 공사 끝에 새 집을 완성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며 대문채는 1927년 11월에 완성됐다.
 주거의 배치형태는 사랑채, 안채, 아래채, 행랑채, 대문채의 5채로 구성돼 있으나 일반적인 튼□자형의 구성이 아니라 튼ㄷ자 형식의 본채 부분과 〓자형의 행랑채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한 사랑채와 안채의 구성도 담장으로 완전히 구분해 출입을 달리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역성을 완벽히 확보한 구성적 특이함이 있다.
 대문채는 높은 담과 많은 계단 위로 높여 있어 권위감이 높다. 원래 5간의 솟을 대문이었으나 사랑마당 쪽의 일부가 훼철돼 지금은 행락영역에만 고방과 문간방만 남아 있다.
 이 문간방은 행랑채의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툇마루를 뒀다. 사랑채는 전면 4간 측면 2간의 겹집으로 가운데 2간의 방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각각 한칸 씩의 마루방을 뒀는데 동편으로는 공루를 앞으로 내고 나머지는 퇴를 뒀다. 공루 아래는 사랑 부엌을 들였다.
 안채로의 진입은 대문간을 지나 깊은 기와 담장 길을 지나 다시 중문간을 통해야 가능하다. 특히 중문간은 골목의 정면에 두지 않고 다시 꺾어 위치시킴으로써 독립적이면서도 매우 깊이감을 더하게 한다. 중문 앞의 조그만 화단은 이러한 깊은 시선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구성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행랑이 돌아 앉아 있고 안마당에 우각진입하게 된다. 행랑은 온돌방 두간과 공루를 뒀다. 안채는 전면 5간 측면 2간의 겹집이지만 호남지방의 근대주거유형으로 많이 보급돼 있는 전후좌우 툇집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목수가 그 지방이거나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특수한 형태이다.
 김씨 고택은 지난 2009년 3월 12일 문화재 자료 462호로 지정됐다.
 △악양면 정서리 조씨 고택
 악양의 많은 주거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집은 흔히 ‘조부자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주택이다. 풍양 조씨는 조선태조 정종 태종 3대에 걸쳐 정의정을 지낸 조준(1346~1405)의 직계손이며 헌종의 모친인 신정왕후 조씨(1808~1890)의 조카인 조재희에 의해 1800년대 중반에 건축됐다고 한다.
 중앙의 세도 싸움에서 밀린 낙향한 양반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세도가 역할을 했다 한다. 이러한 배경은 악양을 배경으로 한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에 가깝다고 하겠다.
 구전에 조부자가 16년에 걸쳐 건축한 것이라고 하나 안채의 살량에 “開國 五百二十七年 成午 立柱上樑”이라고 돼 있어 당시에 건축된 건물과 다른 안채의 건물이 신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주택은 원래 정면 6간 측면 2간 사랑채와 후원에 초당과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동학혁명에 화재를 당하고 또한 6ㆍ25에 다시 불타 현재는 안채와 항랑채만 남아있다. 따라서 지금의 주택은 ㄱ자형의 안채와 ㅡ 자형의 안채가 앞 트인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랑마당은 한쪽에 규모튼 방지만이 남아 있어 옛 영화의 아쉬움을 더하게 한다.
 주거의 구성은 정남향한 넓은 터에 남쪽으로 긴 대지가 및 단으로 조성돼 있다. 대문은 1단의 단촐한 구성으로 정면 동측면에 위치하며 대문에 들어서면 행랑마당을 지난 서쪽 끝으로 깊은 터를 파서 대규모의 방지를 만들고 석축을 높이 쌓았다.
 사랑마당이 있어 많은 작업이 원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상부에는 전체가 다락으로 구성돼 있다. 정지의 벽은 통기에 용이하도록 세살창으로 구성돼 있다. 대청과 건넛방 앞에는 4간이 모두 토로 현상돼 있다. 대청은 전면 2간측면 1.5간으로 넓게 구성돼 있고 5량으로 가구됐다.
 건넛방은 온돌방 1간에 서쪽 끝으로 마루방을 두었고 각 갑의 뒤에 골방을 뒀다. 따라서 대청 쪽은 2간 깊이로 구성이고 안방열은 1.5간의 깊이로 구성돼 있어 전체의 간수가 15.5간으로 이뤄져 있다.
 안방과 건넛방 영영의 굴뚝을 따로 구성, 후원의 석축ㄷ에 붙여 놓았다. 이 높은 석축은 안채의 평탄한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절토한 것으로 당시의 기술력으로 보아 적지 않은 노동력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이 행랑의 뒤쪽과 같은 구성으로 돼 있는데 행랑 뒤의 넓은 자리에 장대석의 초석열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구전되는 초당이 있었던 자리로 파악된다.
 이 초당자리와 안채 사이는 원 지형의 경사를 그대로 운 언덕길이 있고 그 위로 넓은 후원이 형성돼 있다. 이 곳의 안채의 뒤로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주거는 안채영역의 건물만 남아 있지만 빈 터로 남아 있으며 사랑의 서쪽으로 안채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음을 돌계단과 석축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랑채 영역은 이 통로에 의해 좌우로 나누며 방지틀 앞에 두고 넓은 터가 있어 벌당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채 영역은 높은 기단을 쌓아 사랑채 영역과 구분해 안채의 중문이 있었을 자리에는 잘 다듬은 돌계단만 남아 있다. 이곳에는 한간의 헛간만 남아 있다.
 그 반대편인 서쪽에는 측면으로 돌아않은 행랑채가 안채를 바라보며 있는데 전면 6간 측면 1.5간으로 나가는 대문간을 뒀다. 안채로의 출입을 사랑으로 하지 않고 따로 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옛날 많은 식솔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ㄱ자형 평면에 양쪽지붕이 모두 팔작으로 구성도 있어 매우 우아한 자태를 보인다. 전면으로 나와 있는 정지와 안방이 남북으로 일력로 위치하며 안방의 측면으로 남향해 대청과 건넛방이 위치한다.
 안방은 3간의 온돌방이 연이어 있고 그 뒤편에 골방이 일렬로 붙여 있어 기능적 편의성을 더했다. 정자는 전면2간 측면 1.5간의 넓은 공간으로 구성돼 있고 내부에 기둥이 그 가구수법이나 규모가 가히 하동의 대표적 가옥으로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건축으로 볼 수 있다.
 △악양면 정서리 이씨 고택
 악양의 역사는 삼한시대부터 시작되는데 이 곳은 변한의 12 부족국가 중 하나인 악노국이 바로 여기 정서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 토성이 마을 주변에 남아 있다. 이러한 유서깊은 마을에 먼저 터전을 잡는 것은 전주 이씨로 주변 일대가 대부분 그들의 터전으로 형성돼 있었는데 이 주택의 바로 뒤에 있는 한옥은 50여 년 전에 밀양손씨가 매입해 재실로 사용하고 있고 이 주택은 1962년 현재 주인인 합천 이씨의 부친이 매입해 이주했다.
 안채의 살양에 ‘개국 五百三十四年乙三月一日立主上樑’(1925년)이라 기록돼 있다.
 이 주거는 구성은 남향의 넓은 터에 안채만 기와로 구성돼 있고 나머지는 후대에 개축한 블록조의 건물로 아래채 축사 대문채가 튼 ㅁ자형으로 돼 있다.
 가운데 넒은 마당에는 원래 사랑채가 2간의 툇집이 있었다고 하나 해방 직후에 매각됐다고 한다. 아래채는 원래 5간의 다문채가 있던 곳으로 전 주인이 매도했다고 한다.
 이곳에 60년대 후반에 3간의 서행랑을 지었다. 대문채는 1984년에 신축한 것으로 원래 3간의 행랑이 있던 자리이다. 이때 축사도 같이 건축했다. 안채는 팔작 기와집으로 전면 6간 겹집의 대규모 건축으로 원형의 모습이 잘 보전돼 있다.
 기본적 규모는 전후툇집으로 이뤄진것 같으나 간의 크기가 매우 다양해 대략 5자, 7자, 8ㆍ9자의 크기가 다양하게 적용돼 있다.
 전면은 5자의 깊이로 퇴가 있으나 후면은 7자의 깊이로 규모 큰 퇴가 형성돼 있다. 평면은 저면의 구성이 정지 안방 2간 마루 건너방 공루로 돼 있고 방들은 겹집과 같이 전후의 공간을 장지문으로 구분해 기능적 편리함을 도모했다.
 정지앞으로 툇마루를 달아 벽을 막아 실로 만들었는데 식탁을 차릴 준비를 하는 반 빗간으로 여간한 상류주거에서도 보기 어려운 공간이다. 저지의 서쪽 측면으로 벽장을 달았는데 이곳에 살강을 두었을 것이나 지금은 싱크대가 자리하고 있다. 정지의 상부는 다락을 두어 반 빗간에서 출입하게 했다.
 안방은 장지문으로 구분된 아래 윗방이 있었고 각의 후면에 뒷방이 붙여 있는 구성이었으나 지금은 정지문을 없애고 넓게 사용하고 있는 마루는 전면에 사분합문을 달고 연등천정으로 구성해 상부의 가구를 잘볼 수 있다.
 건넛방은 안방 웃방과 같은 규모로 돼 있다. 건넛방 끝으로 공루를 뒀는데 툇마루의 높이보다 73cm나 높게 구성했다. 공루의 전 측면은 열어 들개 분합문을 달았고 후면에는 수장곤간을 뒀다.
 안채의 후원은 일부 화계로 구성, 높은 기단을 쌓고 담장을 뒀으나 뒷면의 텃밭으로 가는 넓은 계단이 있는데 그 곳에 있는 밀양 손씨의 재실과 같은 집안이었을 당시에는 별당 혹은 재실로 가는 통로로 사용됐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군 관계자는 “우수하고 독특한 전통 건축문화가 소멸되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전통가옥을 영구보존키로 했다”며 “전통가옥 연구ㆍ조사를 통해 책자도 발간해 후손들에게 교육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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