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0:20 (일)
출가(出家)는 왜 한 것인가
출가(出家)는 왜 한 것인가
  • 박재근
  • 승인 2012.05.28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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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오신 날, 올해도 그 길을 걸었다. 엄마 손잡고 절을 찾았던 그 꼬부랑 산길을 걸었다. 자식 잘되라고 두 손 모아 합장하는 그 모습을 그리며 걷는 당시 꼬마불자가 어느덧 이순(耳順)을 넘었으니 하세월인가보다. 그런데 그 산길이 올 초파일은 왠지 씁쓸했다.

 사찰입구부터 줄 이은 연등과 법당 앞을 꽉 메운 연등은 축제분위기로 휩싸여야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했다. 한국불교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 파문’이 불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도박 동영상에 룸살롱 출입 등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폭로전은 법당을 뒤덮고 있다. 또 법당에서 도박판이 벌어지고 사찰재산까지 저당 잡혔다는 논란은 무소유, 청빈은 더 이상 불교를 상징하는 단어가 아닌 듯하다. 이 와중에 승단의 규율과 법도를 수호하는 호법부의 해명이 세속에서 회자되니 딱하다. 그 스님의 해명이란 게 ‘진술서(도박 연루 스님들)를 보니 판돈이 400만~500만 원에 불과하더라. 억대란 보도는 잘못된 것이다’ ‘스님들에게는 여러 형태의 놀이 문화가 있는데 (이번 도박은) 치매 예방을 위한 내기 문화 겸 심심풀이다’ 그렇다면 판돈 400만 원 정도는 치매예방을 위한 건강놀이란 말인가. 물론, 국민 앞에 사과한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승려들의 일탈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 무감각을 드러낸 것이어서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할 뿐이다.

 도대체 출가(出家)를 왜 한 것인가. 그 스님들이 개인 사업으로 번 돈이 아니라면 판돈의 상당 부분은 시줏돈이나 공양미로 얻은 돈 아니겠는가. 그 시줏돈의 감사일 수도 있지만 자식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다복한 가정을 소망한 간절한 바람이니 단돈 1천원이라도 시줏돈이 노름판 판돈에 섞였다면 참회의 해명은 처절하리만큼 진지해야 하지 않을까.

 조계종단 안팎에서는 권력화와 이익 집단화된 5대 계파를 즉각 해체하는 등 이번 기회에 종단의 근본적인 폐해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승려들은 그동안 세속과 너무 가깝게 지내왔다. 일반인들도 술을 곡차라고, 삼겹살을 삽겹적으로, 담배를 향공양이라고 하는 승려문화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웠다. 세속인들이 승려를 존경하고 그들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하는 않는가. 그것은 승려가 수행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중’의 높임말이다. 시중의 농담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중이 싫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못된 중은 땡추, 땡중으로 불린다. 거액 포커 판에 어울리고 룸살롱에서 ‘2차’(성 매매)를 나간다면 이 시대의 수행자가 아닌 땡중이 아니겠는가.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스님은 오늘의 현실을 마치 곁에서 보기라도 한 양 말했다. “우리들의 아침저녁 행적을 돌아보면 불법(佛法)을 빙자해 구차하게 이익을 탐하고 속세의 것에 골몰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하고 말이다. 이제와 참회ㆍ쇄신을 외친들 돌아선 불심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을 것 같다. 그나마 물들지 않은 청정지역에 대한 실망과 충격과 배신감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믿는 도끼에 여지없이 발등을 찍히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럴수록 가난한 여인의 정성어린 등불에 부처가 감동했다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의 고사를 뼈저리게 되새겨야 한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는 승려(僧侶)다. ‘중’이 아닌 ‘스님’으로 불리는 승려들은 본분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스님은 불교의 구심점이고 지주다. 출가정신과 청정계율로 무장한 제2, 제 3의 성철, 법정스님이 나와 종단의 주역으로 부처님 법을 설하고 중생 교화에 나서냐에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깨닫길 바란다. 부처님의 호통이 절간을 올렸을 초파일을 계기로 불교계는 환골탈태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내년 초파일에는 밝고 맑은 마음으로 그 절을 찾는 산길을 걷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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