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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2
사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2
  • 승인 2009.02.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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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엄청난 그 일들에 대한 기억
 단행본과 비교하면, 그림책은 여러모로 ‘도전’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굳이 ‘표준’사이즈라 할 만한 규격 없이 꽤 자유로운 판형(책크기)이나 글자크기와 서체, 혹은 그림과 지문의 배치와 전체적인 이미지의 구성에서도 얼마든지 ‘파격’이 가능하다. 다양한 색의 사용이나 회화적 기법을 활용하는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 창의적인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까지 입혀지면 가히 하나의 작품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읽는 이를 가장 긴장시키는 것은 적은 분량으로 짧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림책이 결코 가볍고 시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어린’ 상대에게, 다소, 함부로 내지는 건성으로 “그 때는,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을 무심코 건네는 날에 과연 ‘그 때’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길래, 세상 어디에 ‘시작’이 된 배경이나 원인이 없던 것이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무식하고 무모하게 전부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지 따끔하게 다그쳐 주는 책이 있다.

 처음으로 이를 뺐던 날을 기억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필자의 경우 아랫니는 통닭을 먹다가, 윗니는 초콜릿을 베다가 ‘이물질’처럼 뱉어 낸 것이어서 다행히 공포스럽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이가 흔들리는 것을 감지한 마들렌에게는 엄청난 일임이 분명하다. 마들렌이 누구던가. 넓은 우주 속의 행성, 그 행성의 한 대륙에, 그 대륙의 한 나라에, 그 나라의 한 도시에, 그 도시의 한 집에, 그 집의 창가에 서 있는 어린 소녀가 아니던가! 마들렌은 모두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동네를 다 돌고 온다. 다국적 이웃들의 이국적인 격려와는 달리 아마도 맞벌이라 추정되는 부모님은, 마들렌에겐 이렇게 신나는 하루는 처음인 날에 종일 어디 있었냐고 다그치지만 말이다. 피터 시스의 『마들렌카』(베틀북) 이야기이다.

 모두가 과연 그 책을 다 읽을 수 있을지 미덥잖은 시선을 보내는 주인공이 결코 책을 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데, 왜 절대로, 절대로,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수 없는지 항변하는 레피 찰립이 글을 쓰고 존 J 무스가 그림을 그린 『내가 얼마나 이 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아세요?』(내인생의책)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한 일을 안 했다 하거나, 안 한 일을 했다 하지 않는 조금의 거짓도 없지만 책을 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도저히 책을 다 못 읽고 잠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십분 공감된다.
 셜리 휴즈가 지은 『앨피에게 장화가 생겼어요』(보림)에 나오는 빨간 새 구두를 가진 애니 로즈라는 동생이 있는 앨피는 매일 낡은 갈색 구두를 신고, 좋아하는 진흙탕에서 질척거리다 신발도 젖고 양말도 젖고 발까지 다 젖는다. 엄마가 반들반들 윤기 나는 노란 새 장화를 사 주자 너무나 신이 나 장화가 든 상자를 시장에서 집까지 혼자 들고 와서, 이러저리 쿵쿵거리며 신어보는 장면은 매일 똑같아 보이는 날이 아이들에게는 최고로 특별한 날일 수도 있음을 새삼스럽게 환기시켜 준다.

 세 권의 책은 바쁘고 고단하다는 이유로 사랑니 하나쯤 뺀 것은, 혹은 어제 한 일을 오늘 또 하는 것쯤은 아니면 신상 구두 하나 지르는 것으로는 조금도 두렵거나 특별하거나 설레지 않는 어른들도, 사실은 마음속에 평화로운 냇물이 있음을 기억하게 해 줄 것이다.

김은엽(장유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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