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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설엔 ‘세뱃글’이 어떨까요
올 설엔 ‘세뱃글’이 어떨까요
  • 승인 2009.01.2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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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민
사회부장
 설 하면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세뱃돈을 연상하게 된다.

 아이들은 ‘올해에는 얼마나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설을 맞는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아니 세시풍습이니, 민족의 명절이니 하는 거창한 말은 필요 없고, 계절 마다 연중 새 옷을 입는 탓에 새 옷(설빔)을 얻어 입는 것도 안중에 없다.

 요즘 아이들은 오로지 세뱃돈 수입을 위해 설날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세뱃돈 수입 총액을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PC방으로, 또는 오락기. 휴대폰을 사기 위해 설날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반면 어른들은 어떤가.

 아이들에게 나눠 줄 세뱃돈을 계산해 호주머니를 채워 놓기 바쁘다.

 백발이 허연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 해 동안 꼬깃꼬깃 모아 놓은 용돈을 아낌없이 내 놓는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어른들은, 특히 올해 같은 불황일 때는 세뱃돈이 적지 않은 명절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린 조카들이 많은 대가족 어른들은 세뱃돈 부담이 더욱 크다.

 요즈음은 세뱃돈 액수도 어른들을 더 큰 고민에 빠트리게 한다.

 아이들의 씀씀이가 늘어나면서 돈에 대한 인플레까지 작용해, 세뱃돈 액수에 따라 어른의 능력을 평가하며 바라보는 얼굴빛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세뱃돈으로 수표를 주는 어른들도 있다고 한다. 세뱃돈이라기보다 어른들의 과시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액운을 쫓아내기 위한데서 비롯됐다는 세뱃돈의 유래가 퇴색이 돼도 한참 퇴색된 듯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른이 아이를 위해 준비하는 세뱃돈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치를 보는 ‘속물돈’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마음마저 든다.

 여기에서 우리 선인들의 지혜로운 설날 풍속도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 집안 어른에게 세배를 하면 세뱃돈과 덕담을, 또는 덕담 대신 덕벼루를 앞에 놓고 붓글씨를 써서 봉투에 넣어 주었다 한다.

 덕필(德筆) 즉 세뱃글 이었다. 그 사람의 행실이나 처세를 감안해 교훈이 될 한자 하나씩을 써서 주었던 것이다.

 집에 들고 와 무릎 꿇고 펴보게 돼 있었는데, 이 글은 한자 서너 자로 쓰여진 한 해의 가르침이었다.

 세뱃글이 외자면 일자훈(一字訓) 또는 일자결(一字訣), 세 한자가 씌었으면 삼자훈(三字訓)ㆍ삼자결(三字訣)이라 했다.

 이를 테면 ‘기가 사나워 매사에 덤비는 아이’라면 ‘소걸음으로 가라’는 뜻으로 ‘牛步行(우보행)’이라는 삼자훈을 써 주었다.

 남명 조식(曺植) 선생이 즐겨 써주었다던 삼자훈 세뱃글은 칼에 눌리듯 마음을 신중히 하라는 ‘인중도(忍中刀)’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세뱃글을 받는 아이가 한 해 동안 고쳐 나갔으면 하는 가르침을 뜻 글로 써 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세뱃글을 한 해 동안 거처하는 방 동쪽 벽에 붙여 놓고 아침 저녁으로 명심하며,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올 설에는 세뱃돈에 신경 쓰기보다는,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교훈이 될 수 있는 세뱃글을 하나씩 써 주면 어떨까 싶다.

 로마신화에서 돈의 여신인 ‘주노 모네타’가 ‘경고의 여신’이기도 하듯, 세뱃돈으로 아이들을 경고하기 보다는 세뱃글로 교훈을 주기를 제안한다.

 멋지게 붓글씨를 쓰지 못해도 좋다. 인터넷에서 좋은 세뱃말을 찾아 맘에 드는 글씨체로 프린해 아이들에게 세뱃글을 주는 풍속도도 괜찮을 것 같다.

 어쩌면 세뱃글을 받은 아이들에게 평생 남을 수 있는 설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종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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