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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독립운동가 이명하 선생 선정
12월의 독립운동가 이명하 선생 선정
  • 승인 2006.11.3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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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보훈지청·광복회, 국권회복·조국독립헌신 공로
국가보훈처 마산보훈지청은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명하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명하 선생은 경기도 광주에서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정통 사대부가에서 태어났다.

개항 이후 외세의 문물이 밀물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 위정척사론을 견지하던 유인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면서 전통적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관직에 나아가 제천군 주사로 봉직하며 국민 계몽을 위해 근대학교를 세워 교육계몽운동을 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돼 국권이 훼손되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박차고 나왔다. 쓰러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고,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운동에 투신한 것이다.

유인석의 문하로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해 소모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들을 숙청해 민족의기를 드높였다. 이후 이강년 의병장의 지시로 각지로 다니며 의병운동의 발흥을 촉구하다가 일경에 피체돼 옥고를 치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일대의 의병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이 합류해 대한독립단을 창단하고, 무장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했다.

대한독립단 무장대에 참여해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압록강 대안의 교통의 요충인 중국 안동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동지들과 군수품 등을 마련해 재차 무장투쟁을 준비했으며 그러던 중 일본영사관 경찰들과 격전을 벌여 일경들을 처단한 일이 발생했다.

이에 일본영사관과 평북경찰부 소속 경찰대의 추격을 받았고, 1921년 3월 3일 일본경찰대의 습격으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결국 이 전투에서 선생을 비롯한 15인의 독립군 용사들이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이 같은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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