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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통수권③ 특허 욕구 5단계설
특허통수권③ 특허 욕구 5단계설
  • 경남매일
  • 승인 2024.02.06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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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원 변리사
허성원 변리사

어린 시절 장래 희망은 책방 점원이었다. 언제나 마음대로 온갖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책방은 어린 내겐 낙원처럼 보였다. 책이 많은 친척이나 친구 집이 무척이나 부러웠었는데, 중학교 때 어느 날 우리집에 책이 가득 찬 책장이 생겼다. 큰누나가 세계문학전집과 우리나라 단편소설전집 등을 월부로 왕창 사들여 놓은 것이다. 누나는 그 뒷감당에 고생이 컸겠지만, 나는 한동안 너무도 행복했었다. 그랬던 내가 얼마 전에는 오래된 책 수백 권을 정리하며 기부하거나 내다버릴 정도로 책이 넉넉해졌고, 심지어는 스스로 글을 지어 신문 등에 싣는 칼럼니스트가 되어 있다.

사실 모든 인생사가 대개 그런 모습으로 진화한다. 하루 땟거리를 걱정하던 궁핍한 삶을 산 사람은 어떡해서든 입을 것 먹을 것 줄이고 아껴서 살림을 늘린다. 그렇게 하여 조금이나마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크고 작은 모임에 나가 남들과 어울리기 시작하고, 때로는 남들 앞에 서서 모임을 이끌며 존중 받는 위치를 추구한다. 그러다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등 고결한 목표를 실천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욕구가 발전해가는 과정을 선명하게 설명한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이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는 기업의 특허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이를 특허 욕구 5단계라고 부르기로 하자. 특허 욕구 1단계는 내 기술이나 내 특허가 없다. 그래서 남의 기술을 훔치거나 베껴 쓰고 때로는 사용료를 주고 빌려 써야 한다. 이렇게 자기 기술이나 특허가 없는 서러움을 경험하고 나면 그에 보복이라도 하듯 물불 가리지 않고 마구 특허출원을 하여 양적 확대를 추구한다. 이때가 특허 욕구 2단계로서, 특허의 수는 많지만 정작 필요할 때 힘을 쓸 만한 것은 드물다.

이 단계가 지나면 좀 내실 있는 특허를 추구한다. 나름의 독자 기술을 구축하고, 분쟁이 생겼을 때 제법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유효한 특허가 조금씩 늘어나면 특허 욕구 3단계쯤에 이른 것이다. 이쯤에서는 그만그만한 기술들이 시장에서 충돌하게 되니 사나운 강아지 콧잔등 성할 날 없듯 갈등과 분쟁이 많아진다. 특허 욕구 4단계가 되면 이제 특허의 양적 확대를 그만 두고 오직 무기로서 쓸 만한 양질의 특허만을 취득하려한다. 소위 질 관리의 단계이다. 이 때의 특허는 전략적으로 잘 고려되고 다듬어진 무기들이기에, 다른 기업들의 특허 침해를 공격하여 제압하는 승소 경험이 많아지고, 라이센싱이나 협상 등을 통해 특허 수입도 늘어난다. 드디어 특허 생태계에서 포식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 다음의 최고 수준인 특허 욕구 5단계는 어떤 경지일까? 이는 사실상 해당 산업계의 기술 표준을 주도하는 단계이다. 많은 특허가 해당 업계의 표준 기술이 되어, 업계 대부분의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사용료를 지불하며 쓰게 된다. 그래서 복잡하고 불편한 협상이나 분쟁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기술 사용료 수익을 누린다.

이러한 특허 욕구의 성장 단계들은 지금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활발히 비즈니스를 영위하고 있는 많은 우리 기업들이 대부분 거쳐 온 발전 과정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4위의 다출원 국가이지만, 80년대에만 해도 우리나라는 글로벌 특허 분쟁에서 절대 약자인 특허 빈곤 국가였다. 1986년에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와 특허 분쟁에서 삼성전자가 수억 불의 기술료를 지불하기로 하고 화해했을 때는 온 나라가 큰 난리라도 난듯이 떠들썩했었다. 그 후 삼성전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큰 기업들은 서로 경쟁하듯 특허출원 건수를 마구 늘려, IMF 직전에는 연간 특허 출원 2만 건을 훌쩍 넘긴 기업이 여럿 나왔다. 그 후 우리 기업들은 수많은 분쟁을 거치면서 특허의 질적 관리와 표준화 전략을 통해 세계 특허 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술 수출액이 기술 도입액에 근접하고 있어 머잖아 어엿한 기술 수지 흑자국이 될 희망이 보인다.

이처럼 특허 욕구 단계들은 대체로 개별 기업이나 산업계가 순차적으로 거치며 경험하는 절차다. 마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초중고 및 대학 과정을 차례로 밟는 것과 같다. 하지만 매우 드물게는 통상의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계를 뛰어넘는 경우가 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어린아이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건너뛰고 대학에 가는 것처럼 말이다. 생태계에서는 돌연변이가 그런 형태로 드물게 나타나고, 산업계에서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과 같은 파괴적 혁신이 그런 발전 단계의 파괴를 불러온다. 이 시대 정보 기술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여러 빅테크 기업들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 순식간에 업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였다.

특허 욕구 단계에 따라 그 특허의 품격과 위엄이 다르다. 이는 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으로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최상은 그 존재만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가까이 하여 칭송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업신여기는 것이다(太上下知有之 其次親而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_ 노자 도덕경 제17장)." 존재만 아는 정도라면 표준특허의 수준일 테고, 칭송받는 특허는 파괴적 창조를 이룬 우수한 기술에 관한 특허를 생각할 수 있다. 전투적 무기로 만들어진 특허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저 장식적인 용도로만 쓰이는 특허는 업신여김을 받기 쉽다. 그런 장식적 특허도 어떤 기업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특허통수권자들은 자신의 특허 욕구 단계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특허에도 품격이나 등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수준에 맞는 적절한 특허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수 있다. 높은 이상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역량이나 시스템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몽상에 불과하다. 현재의 특허 욕구 단계를 파괴하여 뛰어넘고자 한다면 그에 걸맞는 혁신 환경과 혁신 역량을 제대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귀사의 특허 욕구는 어느 단계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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