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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는 차가운 자본시대에 온기이죠"
"서정시는 차가운 자본시대에 온기이죠"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2.05 2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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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시인 인터뷰]
시, 세상 온갖 것으로 짓는 농사
시, 삶의 의미 발견할 수 있는 힘
시, 우울 시대를 치유, 마음의 밥
배한봉 시인은 "자본이 위력을 발휘할수록 시민들은 서정보다 밥이 우선이다"고 말한다.
배한봉 시인은 "자본이 위력을 발휘할수록 시민들은 서정보다 밥이 우선이다"고 말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다. 복잡한 현대 물질문명 속에서 서정만을 노래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과연 서정시의 시대는 정말 끝이 났는가? 시대를 거스르는 것 같지만 아직은 희미하게 남아있는 서정의 빛을 받으며 모자란 양분을 섭취하며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할 것인가?

이제는 영상의 시대를 넘어서서 인간의 지성을 앞지르는 강한 인공지능(AI)이 곧 탄생할 것이다. 이런 우울한 전망이 나올수록 더욱 '나'다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인간은 '나'의 내면과 감정을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배한봉 시인은 말한다.

이 바쁜 시대에 도대체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 온갖 소설이나 산문,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의 영상이 넘치고 SNS에 볼거리가 산적해 있다. 물론 이것들과 함께 시를 읽는 마음의 여유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복사꽃 아래 천년'(2011)으로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배한봉 시인에게 시가 진실로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들어봤다.

시가 하는 역할은 어떤 것인가?

시는 인간 삶 속에 있고 우리와 함께 숨 쉬는 것이다.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하죠. 어떻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정서와 내면을 상상력으로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다. 더러 무슨 말인지 모를 시도 있죠? 나의 내면과 정서를 상상력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비논리적일 때도 있고 주관적 감정이 개입해서 언어를 라면처럼 꼬불꼬불하게 만들어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는 매번 먹는 밥 대신 특식을 먹는다 생각하고 읽으면 좋겠다. 마음의 밥인 시를 통해 여러분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대한다.

이 시대에 시란 과연 무엇이며, 시인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영상의 시대에 시인이 넘치고 있다. 가끔은 시인끼리의 잔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시는 '나'의 감정과 내면을 창의적으로 발견하고 표현해서 삶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 글쓰기의 한 방식이다. 사람들이 영상이나 게임 같은 흥밋거리에 눈길을 빼앗기는 시대일수록 시를 읽고 쓸 수 있는 다양한 계기를 마련해줘야 한다. 시는 상징적으로 세상의 온갖 것으로 짓는 농사다. 시인은 그 농사를 짓는 농부다. 삶의 의미를 발견해서 파종하는 자이고 표현하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시인이다. 아무리 쌀 소비량(시 읽는 사람)이 줄고, 우리끼리 잔치라고 해도 사람은 결국, 다 농부가 지은 농산물을 먹고 산다. 농부가 땅을 놀리지 않고 농사를 짓듯 시인은 부지런히 시 농사를 지어야죠. 요즘 시 치료 관련 학문도 있다. 시를 읽고 쓰고 사유함으로써 우울한 시대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죠. 농부는 전문 농부도 있고, 취미 삼아 몇 평 텃밭을 가꾸는 농부도 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전문 농부와 취미 농부는 여러 차이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다만 농토를 사서 농부인 척하는 사기꾼 농부는 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 생활을 선택하신 이유는?

지금은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시골 생활을 한 시기는 90년대 말이다. 칠팔 년 정도 우포늪이 있는 창녕에서 살았죠. 함안 시골 출신이라 흙을 밟고 사는 삶을 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문명적인 것에 습관적으로 자꾸 안착하려는 마음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 무렵 아이가 중이염을 크게 앓았는데, 우포늪이라는 천혜의 자연이 가진 생명성을 시로 탐구하고 싶던 차에, 그게 계기가 돼 겸사겸사 직장을 그만두고 이삿짐을 쌓던 거죠.

서정시의 시대는 과연 지났는가?

'서정시의 시대는 지났는가'라니, 쉬워 보이면서 어려운 질문이군요. 우리에게 제대로 된 서정의 시대가 있기는 했나요? 시대는 늘 변화하고 있죠. 시 역시도 그렇다. 문예사조는 고전주의 이후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실존주의로 이어져 왔어요. 20세기 들어서부터는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래주의니 표현주의니 다다이즘이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모더니즘 운동이 활발해졌죠. 이런 문예 운동은 서정시 대신 현실의 결핍과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문학적 지향을 드러내는 방식이죠. 자본의 논리가 제일 상층부에 자리한 우리 시대는 서정시를 쓰기가 쉽지 않아요. 일제 강점기에 서정시를 쓰기가 어려웠던 것처럼요. 자본이 위력을 발휘할수록 시민들은 서정보다 밥이 우선이죠. 꽃보다 목숨을 먼저 지켜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서정시는 지켜야 하는가?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감성을 지배하고 세계를 점령하는 시대는 반서정의 시대라 할 만해요. 아도르노의 말을 변형하자면, 이런 암울한 시대에 서정을 운운하는 것은 야만이죠.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역설이다. 그럴수록 서정을 지키려는 노력은 더 필요하다. 서정시를 쓰기 어려웠던 일제 강점기에 순수서정시를 지향했던 시문학파처럼요. 99%의 시민이 서정을 외면해도 1%의 시인은 서정을 지켜야죠. 그렇지 않다면 자본의 차가운 손등에 누가 따뜻한 온기를 전하겠는가?

시의 방향성은? 요즘은 어떤 시를 쓰시는지?

늘 사랑과 평화를 지향한다. 몇 년 전에 시집 '육탁'을 펴냈고, 그 앞에 '주남지의 새들'을 펴냈다. 전쟁과 소외된 이웃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시집이다. 권영민 전 서울대 교수는 이런 나의 시를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서정을 재해석해서 창작한 것'이라고 평했다. 생태학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지배를 거부하고 조화와 상생을 지향하거든요. 요즘은 내 삶을 통과하는 사물과 시간과 많은 대화를 하려고 한다. 그것이 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바란다.

작품 쓸 때 퇴고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퇴고를 좀 오래 하는 편이다. 시를 쓰고 나면 바로 발표하기보다는 얼마간 묵혀두었다가 다시 읽어보고 발표 여부를 결정하죠. 작품 전체의 내용을 완전히 뒤바꾸는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문장의 어떤 부분이나 단어 같은 사소한 것 때문에 고민할 때가 많다.

 

배한봉 시인 프로필

경남 함안 출신으로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경희사이버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마산대학교 등 겸임교수, 강사로 문학과 글쓰기 등을 강의했다. 1998현대시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육탁’, ‘주남지의 새들’,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악기점’, ‘우포늪 왁새’, ‘黑鳥’, ‘복사꽃 아래 천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이 있다. 산문집으로 당신과 나의 숨결’, ‘우포늪, 생명과 희망과 미래가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시 우포늪 왁새’, ‘아름다운 수작이 수록됐다.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대상, 박인환문학상, 풀꽃문학상 외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계간 시인시각’, ‘시인동네’, ‘시를사랑하는사람들주간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우포늪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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