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01:47 (월)
납릉(納陵)과 라왕(羅王)의 명칭에 대하여
납릉(納陵)과 라왕(羅王)의 명칭에 대하여
  • 경남매일
  • 승인 2024.01.08 2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명스님
도명스님

세상에는 수많은 존재와 이름이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名相(이름과 형상)이라 한다. 또 형상은 그냥 존재하든 아니면 운동성과 어떤 의미를 가지든 언어와 문자로 명사화된다. 이를 '정의'(定義)라 하며,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단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이라 한다. 즉 존재의 핵심을 가장 간략하고 적확하게 표현한 말이 정의인데 거꾸로 정의를 알면 사물의 정체성과 특질도 알게 되는 것이다.

김해에는 전 세계에서도 보기 어려운 고대 국가의 건국자 무덤이 있다. 바로 김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만든 가야의 건국자 김수로왕 무덤이다. 이름하여 수로왕릉 또는 수로왕묘라고 하는데 또 다른 이름으로 납릉(納陵)이라 한다. 그런데 수로왕의 후예인 가락종친들이나 가야의 연구자들도 납릉의 명칭에 대해 명확하게 아는 이가 없다. '들일 納'과 '무덤 陵'자는 뜻으로 풀어도 별 의미가 없고 소리로 읽으면 더욱 이해가 안 된다.

납릉에 대한 최초 기록인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묘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세웠는데 높이가 한길이며, 둘레가 300보인데 거기에 장사지내고 수릉왕묘라고 이름하였다"(遂於闕之艮方平地造立殯宮 高一丈三百步而葬之號首陵王廟也)고 했다. 조선 시대 『東國輿地勝覽』에는 "가야 시조 수로왕이 돌아가시니, 성 북쪽의 납릉에 장사지냈다"(伽倻始祖首露王薨 葬城北納陵)고 나온다. 이처럼 납릉(納陵)이란 용어는 『가락국기』에는 없었고 후대에 덧붙여진 용어임을 알게 된다. 즉 『가락국기』의 '대궐 동북쪽 빈궁'이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성 북쪽의 납릉'으로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옛 문헌은 종종 잘못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것을 바로잡는 핵심은 문맥이 맞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葬城北納陵'이란 문장은 "성의 북쪽에 장사지내고 능에 들였다"로 달리 풀이할 수 있다. 이처럼 '納陵'은 명사로 보기 힘들다. 왜냐면 납릉이 능호(陵號)가 되려면 "성의 북쪽에 장사 지냈고"라는 '葬城北' 뒤에 '號納陵'(납릉으로 불렀다)처럼 '부를 號' 자를 붙여야 한다. 하지만 '號'가 '納陵' 앞에 없다는 것은 납릉이 명사가 아니라 "능에 들였다"라는 동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수로왕의 서거 후 빈궁에서 관을 모셨다고 하니 왕의 발인 후 관을 능에 들인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마을 해설사 심교신 선생께서 인제대 <그랜드가야포럼>에서 납릉의 명칭을 한자 풀이에 의거해 재고할 것을 건의하셔서 살펴보게 되었다.

한편 가야불교 연기사찰 중에는 밀양시 삼랑진읍에 소재한 2000년 전통의 부은사가 있다. 원래의 사명은 부암(父庵)으로 모암·자암과 함께 가락 3대 사찰로 불린다. 수로왕이 아버지를 위해 지었다는 설과 거등왕이 아버지 수로왕을 위해 지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부암의 최초 기록은 1718년에 편찬된 『密州舊誌』이다. 이후 1730년 『분성여지승람신증초』 <佛宇>편과 1797년 김해 은하사의 『취운루중수기』 등에 나온다. 또 『숭선전지』 『가락삼왕사적고』를 비롯한 여러 다른 기록에서 부암의 창건은 가락국 초기이며 김수로왕 내지 거등왕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한편 부암의 최초 기록이라는 『밀주구지』에 "부암은 세상에서 전하길 라왕(羅王)이 부처를 숭상하여 모암과 자암을 김해에 두고 부암은 이곳에 두었다"(父庵世稱羅王崇佛 置母庵子庵于金海 置父庵于此云)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羅王'을 2013년 밀양문화원에서 편찬한 『국역밀주징신록』에서 '신라왕'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현 부은사 주지 지원스님은 부암과 관련한 모든 기록들이나 민담·설화 등을 종합해보면 '羅王'을 "가야의 왕인 <가라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신라왕'으로 해석한 것은 문헌과 유물의 근거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羅王'이란 글자에 대한 해석자의 단순 견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란 것이다.

부암이 가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현 부은사 용왕당 앞에는 인도 토속 신앙의 유물인 요니가 있다. 이는 인도국립박물관 야외에 있는 것과 동일한 형태로 고대 인도와 교류했다는 강력한 증거물이다. 또 바위에 새겨진 가야의 코드 통천도량(通天道場)과 사찰 입구의 태(胎)무덤은 가야왕의 태무덤이라 하는데 이 또한 그냥 생겨난 말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새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재정립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