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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性齋) 허전(許傳)③ 훌륭한 삶
성재(性齋) 허전(許傳)③ 훌륭한 삶
  • 경남매일
  • 승인 2024.01.04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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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68세에 김해부사로 부임한 성재 허전은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관리들이 부패하지 않고 본연의 역할을 잘 하도록 하기 위해 법에 따라 다스릴 것을 천명한 회유문(回諭文)을 공표하였다. 이듬해 봄부터 자신이 거처하던 공여당(公餘堂)을 개방해 유생들을 맞이했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배움을 청한 사람이 백 명이 넘었다.
성재는 김해부사로 재직하면서 아전들이 민생을 해칠까 염려해 추호도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백성들에게도 바른 도리를 마음에 두고 본업을 열심히 해 옳지 못한 일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다.
김수로왕릉은 후손들 덕분에 전각 등 부속 건물이 조금씩 늘어났지만 고종 때까지는 시조왕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정식 인정을 받지 못했다. 수로왕릉에 들렀다가 이것을 본 허전은 늘 안타깝게 여겼다.
조선시대에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위패를 모신 평양의 '숭령전(崇靈殿)'과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위패를 모시는 경주의 '숭덕전(崇德殿)', 백제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남한산성의 '숭렬전(崇烈殿)', 고려 태조 왕건을 모신 연천의 '숭의전(崇義殿)'을 사액으로 인정했다. 
김해를 떠난 뒤에도 이를 잊지 않고 당시 경연관으로 고종에게 상소했다. 허전 덕분에 수로왕릉의 사당이 고종 15년인 1878년 '숭선전(崇善殿)'으로 사액을 받았다. 
1884년에 허전이 찬한 '가락국태조릉숭선전비(駕洛國太祖陵崇善殿碑)'가 수로왕릉의 보호각 안에 있다. 이 비에는 가락국기뿐 아니라 전해오는 다른 기록도 참고해 수로왕의 출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곰곰이 옛일을 살펴보니 가락국 시조의 성은 김씨요 휘는 수로이다. 하늘에서 처음 이 땅에 내려오실 때 금의 상서로움이 있었다하여 김(金)을 성(姓)으로 삼았다. 혹은 소호금천(少昊金天)씨의 후예라서 김 씨라 했다고도 하며 또 말하기를 맨 먼저 나시어 백성을 보살핀 시조라서 수로(首露)라 하고 이를 왕호로 삼았다 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도 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의 윗대 조상을 수로왕과 소호금천씨라고 하고 있다. 소호금천씨에 대해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약 4~5천 년 전에 중국 산둥반도의 간척지에 이주해 들어간 고조선 이주민이 소호금천씨라 불리는 '소호'(少昊)족이었다. 그들은 선진 농업경작과 태양숭배와 새 토템을 갖고 들어가서 산둥반도의 곡부(曲阜)지방에 정착했다.
소호족의 산둥반도 대문구(大文口)문화 유적 상층에서는 약 4~5천 년 전의 고조선족임을 밝히는 '아사달 문양'을 새긴 고조선식 뾰족밑 팽이형 토기 술잔이 11개나 출토됐다. 이들은 간척지를 새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에서 간직해 온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착지에 자치적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하고, 고조선어를 사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갖고 생활해 고조선 문명권의 일부가 됐다. 중국인들이 후에 지역 내의 동이(東夷)라고 부른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동이(先秦東夷)는 바로 고조선 이주민이었다."
김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허전이 김해에 머문 시간은 3년에 불과했지만 많은 선비들과 백성들이 유임을 원했을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당시 고종이 허전에게 내린 글을 보면 알수 있다. "경이 김해부에 부임하면서부터 선비들은 스승을 얻은 자랑이 생겼다. 이제 성적을 보니 백성들은 유임을 간절히 원한다. 진실로 옛날의 어진 수령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허전은 남명 조식의 사상을 따르는 강우학풍을 크게 발전시켰다. 지난 1866년 2월에는 신산서원의 원장이 돼 남명이 수양했던 산해정을 찾아 문도들과 함께 강학했다. 허전의 문하생을 기록한 <냉천급문록>에 등재된 제자만 해도 500명이 넘는다. 그가 얼마나 추앙받는 선비이자 스승이었는지 알 수 있다.
지난 1869년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돼 고종임금의 경연관으로 경전을 강의했다. 경연관의 직무수행을 위해 예문관제학·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79세까지 7년 동안 국왕 계도에 정성과 노력을 다했다. 고종임금이 "신하의 말을 제대로 수용할수 있게 된 것은 허강관 덕분이다"고 했다.
허전은 지난 1886년 90세로 별세했다. 경연을 통해 배웠던 고종은 허전의 부고에 조회를 그치고 시장을 철시토록 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공경의 예를 표했다. 고종은 지난 1888년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가르침은 김해지역에 오래도록 남았다. 지난 1927년 김해의 후학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취정재(就正齋)'를 건립했다. '나아갈 취(就)', '바를 정(正)'을 써서 '바르게 나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는 취정재는 대성동 김해향교 왼쪽에 있다. 취정재에는 허전의 위패와 초상화 복사본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1728호인 초상화 원본은 경기도 용인의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해향교 유림들은 매년 음력 9월 9일 성재의 공을 기리는 '채례(采禮)'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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