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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좀 더 너그럽게 살리라
새해에는 좀 더 너그럽게 살리라
  • 경남매일
  • 승인 2024.01.02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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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원 변리사
허성원 변리사

지난 세밑에 좋아하는 한 배우가 스스로 삶을 거두었다. 오스카상까지 수상한 그 배우의 안타까운 죽음을 많은 이들이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이 사회가 억측에 찬 온갖 말로 모질게 몰아붙였다는 말이다. 수사기관이든 언론이든 어디에선가 흘러나온 말들이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자라 괴물이 되고, 사람의 죄의식과 수치심을 극도로 자극하여 도저히 살아갈 엄두를 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그래서 우리 삶은 까치집과 닮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까치가 나뭇가지를 모아 제 나름으로 둥지를 야물게 엮는다고 하지만, 나뭇가지보다는 바람구멍이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그 둥지에서 까치들은 가족을 이루고 번식하며 대를 이어간다. 우리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다들 안 그런 척하며 살지만, 누구든 그 삶을 들여다보면 제대로 해낸 바른 일들 사이에 실수나 잘못이라는 바람구멍이 쑹쑹 뚫린 까치집과 다를 바 없다.

크고 작은 바람구멍들은 개인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동양화에서 여백의 미를 중시하듯이, 음악도 모차르트의 말처럼 '음표들 사이의 여백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도 살아가며 저지른 숱한 오류가 있어도 그 덕분에 우리 삶이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게 돼 나름의 의미와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간다. 그런데 남의 삶을 그 바람구멍만을 보고 들춰 쑤시고 후벼 파서 죄책감을 자극하고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모진 습성을 가진 인간들이 있다. 그들의 모진 장난질에 마음 여린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뜻하지 않게 떠난다.

10년쯤 전에 되새기게 됐던 아픈 막말의 추억이 하나 있다. 어느 골프장 사우나에서 옛 친구 한 명을 우연히 만났는데, 고등학교와 대학 학과를 함께 다녔지만, 대학 졸업 후 근 30년 만에 처음 얼굴을 본 것이다. 반갑게 아는 척을 하고 근황을 물으니 잘 알려진 한 대기업의 고위 임원이 돼 있었다. 근데 채 몇 마디 말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그 친구가 대뜸 따지듯 묻는다. "그때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어?" 나는 깜짝 놀라면서, 순간 옛날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당시 이 친구와 심하게 다투었고, 그 끝에 내 감정을 좀 격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그대로 박제됐다가 이제 처음 만난 것이다.

그런데 왜 다퉜는지 무슨 독한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기가 찼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내가 했던 말은 그 친구에게 근 30년이 지나도 오로지 냉동 보존돼 있었다.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더 긴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때 일은 정말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다음에 기회를 내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자"라는 말을 하고는 헤어졌다. 그 이후로 두어 번 만나려 시도해 봤지만, 해외근무 등 수긍이 갈만한 이유로 아직 다시 만나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단호한 언어를 섣불리 쓰고는 종종 후회한다. 거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직원들에게서도 그런 아픈 피드백을 가끔 듣는다. 막말의 힘이란 질기고도 무섭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그 이유조차 까맣게 잊었어도, 그 독성은 당사자의 가슴에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너그럽고 여유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수시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아무리 뜻이 맞지 않더라도, 언젠가 상황이 바뀌었을 때 서로가 오갈 수 있는 작은 다리는 반드시 남겨놓아야 한다고도 다짐한다.

50년도 더 된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안방에는 아버지의 궤짝이 하나 있었다. 가로 3자 높이 2자 정도 크기로 한 때는 자개 장식이 있었을 것 같은 낡은 옻칠 궤짝이었다. 그것은 집안의 이런저런 문서와 함께 현금도 보관되는 금고와 같았다. 어느 날 그 궤짝을 여는 방법을 알아내고는 지폐를 한 장 훔쳐 한동안 풍족히 썼다. 그 돈이 떨어지자 두 번째 범행을 시도했다. 그런데 궤짝을 여는 순간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신 것이다. 온 세상이 노랗게 변하고, 하늘이 무너질지 벼락이 칠지 알 수가 없었다. 말없이 바닥만 보고 서 있는데, 영원 같은 짧은 고요가 지나고 나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가봐라."그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당시 애들에 대한 폭력은 드물지 않았으니, 그 상황에서는 뺨이라도 한 대 맞아야 적절했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가끔 그 사건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왜 아무 말도 안 하셨을까? 다른 아버지들처럼 응당 매를 들어 벌을 주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나는 더 착하고 더 훌륭한 인간이 됐을까? 내 볼촉맞은 성격을 생각하면 야단을 맞다가 모나게 대들었거나 빗나간 짓이나 생각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그 무거운 침묵을 나는 평생 감사드리며 살아왔다. 그때 만약 아버지가 내게 뭐라고 크고 작은 혼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명백히 돈을 훔친 도둑놈으로 규정되고 그 인식은 평생 뇌리에 고착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인생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버지가 침묵하신 것도 아마도 차마 아들을 도둑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지 싶다. 그 덕분에 나는 '훔친 놈'이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까지 부끄럼을 모르고 사회에서 나름의 제 역할을 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

위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 말의 모진 힘과 너그러움에 관련된 것들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평생 실천할 수 있는 한마디의 말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그것은 바로 ' 서(恕)'이다(其恕乎)."라고 말하였다. '서(恕)'는 용서, 관용 즉 너그러움을 의미한다. 인간의 너그러움이란, 까치집처럼 온통 엉성한 인간의 삶에서 그 구멍투성이들을 아름다운 여백으로 보아주는 포용의 마음일 것이다. 너그러움은 나이 듦의 훈장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새해를 맞을 때마다 이렇게 다짐해 왔다. 새해에는 좀 더 너그럽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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