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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性齋) 허전(許傳)② 훌륭한 공직자
성재(性齋) 허전(許傳)② 훌륭한 공직자
  • 경남매일
  • 승인 2023.12.2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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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삶은 공직자가 어떤 자세로 공직에 임하여야 하고, 학자와 교육자가 어떤 자세로 학문과 교육에 임해야 하는가를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허전의 삶을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은 본관이 양천(陽川)이고 자는 이로(以老)이며 호는 성재(性齋)로 1797년(정조 21년) 경기도 포천현 본동에서 태어났다. 성재(性齋)라는 호는 29세 때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붙인 재호(齋號)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천명지성(天命之性)이 갈수록 상실되어 가는 것을 개탄하면서 그 성(性)을 회복하기 위한 경계로 삼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성재는 만 4세가 되기 전에 부친인 허형에게 효경을 배울 정도로 타고난 바탕이 영특하였다. 6세에 외조부에게 소학을 배웠고, 8세에 대학을 읽었으며 9세에 시경과 주역의 괘도 대략 읽었다. 그러나 12세에 천연두를 앓으면서 총명이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더욱 독서공부에 노력하게 되었다.

14세에 부친이 관직에 나가 서울에 살면서 과거공부를 하였다. 17세에 조관기(趙觀基)의 막내딸과 결혼하였다. 이해 10월에 부친이 경상도 자인현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1814년) 동생과 함께 부친의 임소로 가서 김효일에게 유학을 약 3년 동안 배웠다.

1817년 부친의 명령으로 안정복(安鼎福)에게 이익(李瀷)의 학문을 사숙한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에 학문을 배웠다. 스승으로부터 "우리 도를 맡길 만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39세가 되던 1835년(헌종 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이듬해 동생이 죽고 이어서 모친상을 당하여 큰 충격을 받고 벼슬보다 학문에 힘쓰고자 했다. 수신지학(修身之學)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두고 <천지변(天地辨)>과 <상위고(象緯考)> 등의 논문을 지었다. <천지변>은 지구와 우주의 구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상위고>는 우리나라 역법의 역사와 별의 분야 및 의상 기구들을 고찰하고 있다.

1840년 기린도찰방의 벼슬을 받고 기근에 허덕이던 이곳을 잘 다스려서 최고의 공과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동지사의 역참 폐단이 너무 심해도 바로잡히지 않아서 사직했다. 이와 관련된 상사의 무고로 벼슬이 4등급이나 깎이는 벌을 받았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로운 자세로 공직에 임하다 당시의 부패한 상관에 의하여 오히려 처벌받았다.

1847년 장마비에 헐어진 집에 머물면서도 안빈자족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를 당시 재상 조인영이 읽고 고상한 사람이라고 칭송하며 함평현감에 임명했다. 함평현에 부임해 덕치로 다스리고 학도들을 향교에 모아 강습을 하였다. 당시 안핵사의 집안사람이 죄를 범하여 안핵사가 여러번 면방해주길 간청했으나 법대로 처벌하였다. 이 일로 안핵사의 분노를 사 고과(考課)에 걸려 사직당했다. 강직하고 공정한 일처리를 하는 관리였음을 알게한다.

철종의 등극과 함께 홍문관 교리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어 경연에 입시하였다. 어리고 몽매한 철종에게 소학부터 강의하면서 자신의 학덕과 힘을 다해 계도하고자 노력하였다. 1852년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에 임명되었다.

1853년 부교리에 임명되어 2년 동안 철종임금에게 경전을 강의했다. 세금때문에 허덕이는 민생과 수신제가의 덕, 인재등용, 부패한 관료들의 척결 등을 주장하였다. 과거시험장에서의 부정을 경연시 고하였다가 관련자들의 원한으로 무고를 당하여 유배를 가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철종대에는 경연에 다시 나가지 못했다.

진주를 비롯해서 삼남지방 18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그가 늘 우려했던 방백과 수령들의 탐학과 부패 때문에 백성들이 도저히 참지못하고 일어났던 것이다. 국왕이 모든 관리들과 유생들에게 삼정을 혁신하는 책문을 내려서 허전도 평소 자신의 경세사상에 입각하여 <삼정책(三政策)>을 지어 바쳤다.

<삼정책>에서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지 불균형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전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전제를 시행하기는 어려우므로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하고 매매를 제한하여 점진적인 토지재분배를 실행하자고 했다. 또한 고용노동 등을 일반화시킴으로써 부농층의 발전을 도모하고, 토지분배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아직 항산전을 마련하지 못한 무산자를 위해 직업을 마련해주는 방안을 제시했다.

1864년 고종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우부승지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경연관이 되어 어린 고종에게 효경을 강의하였다. 영남의 민심수습과 지방사족의 지지가 요긴했던 대원군은 <삼정책>을 통해 보여준 허전의 개혁사상에 대한 여론의 신망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어서 김해부사로 발령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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