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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35 한민족 자긍심의 표석(標石)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35 한민족 자긍심의 표석(標石)
  • 경남매일
  • 승인 2023.12.1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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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스님
도명스님

과거 일제는 한·일합방 전부터 우리 역사를 서서히 잠식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구한말 급변하는 국내외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국왕과 대신들은 우왕좌왕했고 백성들은 생존에 쫓겨 저들의 야욕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의 숭고한 역사가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 만주 집안현에서 광개토태왕릉비는 세상에 다시 출현한다.

거대한 비의 크기만큼 태왕의 업적은 위대했다. 그러나 <신묘년조>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부분과 <경자년조> 고구려군이 왜를 쫓아간 곳이 '임나가라'였다는 구절로 인해 일본은 환호했고 조선의 국민은 다시 한번 의기가 꺾이게 되었다. 이후 위당 정인보 선생이 <신묘년조> 기사의 주어는 '왜가 아닌 고구려'라는 새로운 주장 이후 비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앞뒤의 문맥이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모두가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필자는 문제의 <신묘년조> 기사의 변조에 대한 검증과 결락자에 대한 새로운 복원 및 해석을 시도하였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을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 以辛卯年來渡 二破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倭殘國>으로 재구했다. 그리고 <경자년조> '任那加羅 從拔城'의 기사에서 말하는 '종발성'은 명사가 아닌 동사로 풀어야 하며, 임나가라의 위치가 '至'와 '從'의 풀이에 근거해 대륙이 아닌 해양과 관련된 지명임을 밝혔다. 또 '安羅人戍兵'의 해석을 "이에 신라인으로 지키게 했다"로 새롭게 해석했다. 그리고 신라성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대마도나 일본 열도였고, 금관가야의 쇠락 원인이 '고구려군의 남정'이 아니라 열도로 가야인이 집단 이주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능비는 특히 왜와 관련된 부분에서 결락이 많아 해석이 용이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곳곳에 실마리가 남아있어 원래의 글자를 복원할 수 있었다.

현재 이 비는 한·중·일 역사 지형의 축소판이다. 한국은 능비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의 고대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말하며 능비의 진실이 드러나길 꺼리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그들 선조가 자행한 능비 변조라는 역사 공작을 덮기 위해 지금도 진실을 외면한 채 억지 주장만 펴고 있다.

그런데 주류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는 학계에서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나라 학자들이 임나 7국, 10국을 비롯한 임나의 지명들을 옛 가야 땅에 비정한다. 또 얼마 전 임나의 일부 지명을 유네스코에 등재까지 하려 했지만 깨어있는 국민들이 이를 바로 잡았다. 그런데 요즘 한동안 잠잠하던 임나가 일본의 청소년 교과서에 다시 실리고 있다. 교과서에 실린다는 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개인적인 주장과 차원이 다르다. 하나의 불티가 온 산을 태울 수 있듯 왜곡된 역사는 미래 세대에게 또 다른 갈등을 조장하는 요인이 된다. 이 점이 기성세대가 나서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이다.

잃어버린 고조선의 옛 강토를 회복한다는 '다물사상'을 당대에 실현하고 한민족의 영광을 위해 진력했던 우리의 영웅 광개토태왕을 이제 다시 보아야 한다. 그는 단순히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침탈했던 제국주의적 정복 군주가 아니었다. 천손민족의 후예로 '홍익인간' '재세이화'라는 한민족의 드높은 철학을 실천한 현군(賢君)이었으며. 고조선과 북부여의 맥을 이어 하늘의 숭고한 뜻(開天)을 이 땅에 연(開土) 위대한 조상이었다. 이제 빛나는 그의 공적이 누군가의 조작과 오역으로 인해 희석되어선 안 될 것이며 머지않아 이 비문의 진실도 명백히 밝혀지길 염원해 본다.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쓰며 한민족 중심의 세계주의를 천명한 광개토태왕의 원대한 꿈은 시간을 뛰어넘어 마침내 이룩될 것이다. 또 동북아 삼국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기나긴 어둠 속에서 묻혀버렸던 이 능비의 진정한 가치 또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잃어버린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하나의 길라잡이가 되기를 희망한다.

불민한 필자가 숙세의 인연이 있어 김해에 살면서 우연한 기회에 가야불교를 연구하게 됐고, 이는 가야초기의 역사성과 한국불교의 초전(初傳)이라는 사실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그동안 연재했던 광개토태왕릉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향후 우리 역사를 넘어 한·중·일의 고대사를 밝히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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