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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30 임나 대마도설과 큐슈설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30 임나 대마도설과 큐슈설
  • 경남매일
  • 승인 2023.11.1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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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대부분의 전쟁은 영토 문제 때문에 일어난다. 물론 예외가 있긴 하지만 지금 전쟁 중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또한 영토 문제로 인해 싸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 전쟁 중 이-팔 전쟁의 명분은 현재의 영토가 아닌 고대 영토의 소유권 때문에 서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에서 고대사는 곧 현대사이고 영토는 시간을 넘어 국가의 존립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일 고대사의 화두인 임나 문제도 결국 '임나가 어디에 있었나?'라는 임나의 위치 문제로 귀결된다.

고대 지명 연구의 권위자인 부산대의 이병선 명예교수는 임나를 대마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저서 『임나국과 대마도』에서 임나의 위치가 대마도임을 세밀히 밝혔고 여러 번의 답사를 통해 이를 고증했다. 임나를 연구한 대표적인 사학자인 일본 동북대학의 이노우에(井上秀雄) 명예교수는 위 서적의 일본어판 추천문에 "그와 같은 입장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하나하나의 일들을 밑부리부터 생각을 고치는 것이 역사학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일본인의 역사학(한일관계사)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보도록 하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특히 대마도의 지명을 추적함에 임하여 임나가 대마도에 있었다는 것을 해명하고 있습니다"라며 책의 내용에 공감했다.

일본 역사 교과서의 집필자인 동경대학의 오가다(尾形勇) 교수 역시 이병선 교수의 연구에 긍정적인 서신을 보내왔다. 또 대마도 지명연구의 권위자인 향토사학자 후지이(藤井勝男)씨도 서신을 보내와 "흥미 깊은 주장입니다. 특히 대마도의 신라·백제·고구려·임나의 지명 추정에 대해 동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일본의 학계 일부와 향토사학자들까지 '임나는 대마도'라는 이병선 교수의 연구를 지지해 주었다.

한편 임나의 위치에 대한 또 다른 학설은 큐슈를 임나로 보는 것이다. 1963년 북한의 김석형 박사는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내 분국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가야와 삼국이 일본 열도에 분국(分國)을 세웠으며 가야가 큐슈에 세운 분국을 임나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영국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면 '새롭다'는 뜻의 'New'라는 접두어를 넣어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고 이름 붙인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륙에 있던 가야계가 신세계인 일본 열도에 소국을 세울 때 본국인 '가라(가야)'의 국명 앞에 '임나'를 붙여 '임나가라'라는 분국을 세웠던 것이다, 임나의 위치에 대하여 『일본서기』 <숭신 65년조>에는 "임나는 축자국으로 2000여 리 가고, 북은 바다로 막혀있으며,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任那者 去築紫國 二天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 는 기사가 있다. 대개는 '任那者 去築紫國 二千餘里'를 "임나는 축자국에서 이천여 리를 간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我去漢陽을 "나는 한양으로 간다"로 풀이해야지 "한양에서 내가 간다"로 해석하면 출발 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따라서 '축자국에서'처럼 축자국이 출발 지점이 되려면 '去築紫國'이 아닌 '於築紫國'이 오히려 맞다.

임나의 위치가 북조해(北阻海) 즉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라고 했으니 결코 고령이나 김해 같은 육지일 수가 없다. 이처럼 북쪽이 바다로 막힌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대마도나 일본 열도다. 임나의 위치가 '북쪽은 바다'라고 했기에 임나의 위치를 한반도의 내륙에 비정한다는 것은 사료를 무시한 억지 주장일 뿐이다.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은 <阻>를 '막다'는 뜻 외의 '떨어져 있다'는 것으로 보아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로 해석한다. 그러나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사이에 두고'라는 해석은 비문에서 말하는 사실과는 영 거리가 멀다.

왜는 영락 9년 기해년(399)에 신라를 공격했고, 고구려는 영락 10년 경자년(400)에 5만의 군대로 신라를 구원하고 왜의 근거지인 초기 임나였던 대마도를 치고 일본 열도까지 밀고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 <실성이사금조>에 재위 7년(서기 408)의 기록 "7년 봄 2월에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하고서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경자년 고구려에 대패한 왜가 수년 후 재정비하여 수자리(戍兵))하던 신라를 몰아내고 다시 대마도를 점령해 그들의 전초 기지로 만든 것 같다.

이처럼 대마도는 경자년 당시인 서기 400년에는 임나가라로 불렸다가 이후 대마도로 이름이 변했고,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는 바뀐 이름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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