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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장 작성과 변리사의 존재이유
경고장 작성과 변리사의 존재이유
  • 경남매일
  • 승인 2023.10.1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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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특허 침해 경고장 초안이 결제 창에 올라왔다. 사무실의 신참 변리사가 작성한 건이다. 고객 상담을 하고 바로 업무 배정을 했는데,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써 올린 것을 보니 손이 빠른 친구다. 팀장 변리사는 승인하였고 그 내용도 무난하니, 그대로 내용증명 발송하라고 해도 될 만하다. 하지만 결제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경고장이란 게 그 내용은 뻔하다. 사실관계를 제외한 부분은 대체로 상투적인 언어들이다. 아마도 팀장이 참고용으로 준 기존 다른 사건의 경고장을 기초로 사실관계 부분만 짜깁기하여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러니 경고장의 의미와 무게를 충분히 고민하거나 느꼈을 리가 없다. 팀장 입장에서야 자신의 방향에 맞으니 통과시켰겠지만, 나마저도 그래서는 안 되지. 담당 변리사를 불렀다. 그저 가볍게 몇 가지 알려주려 했는데, 배우려는 태도가 좋아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보게. 경고장 작성은 처음이지? 첫 경험을 축하하네. 내용을 훑어보니 딱히 지적할 점은 없더군. 특허출원부터 우리가 진행했던 건이니 기술 이해는 어렵지 않았을 거야. 침해 팩트에 대한 분석은 매우 좋아. 사실관계가 워낙 명료해서, 이것만 봐도 상대가 침해 여부에 대해 달리 반박할 수가 없겠더군. 특허의 구성요소와 침해 제품을 잘 대비하며 문언적 침해를 입증한 논리 전개도 훌륭했어. 수고했네. 그런데 몇 가지 해줄 말이 있네.

우선, 특허는 안전하겠던가? 특허 무효의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 봤느냐는 말이네. 확인해 보지 않았다고? 글쎄, 상대가 있는 일에는 항상 입장을 바꿔보아야 하네. 이 경고장을 자네가 받았다고 가정해 보는 거야. 먼저 정말 특허를 침해했는지 확인하겠지. 그 말이 맞는다고 해서 그냥 넙죽 항복할 수는 없잖아? 특허의 무효 이유를 찾아 그걸로 반박하려 하겠지? 그 일은 침해자 측에서 할 일인데 권리자 측에서 왜 하냐고? 무효가 가능하다면 특허권자는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공격 전략이나 마음자세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겠지. 침해자의 역공을 받으면 오히려 수세에 몰려 얼마나 곤혹스럽겠는가? 경고장을 보낼 엄두를 거둘 수도 있겠지. 그래서 언제나 공격을 하기에 앞서 그 공격에 대해 상대가 어떤 저항 전략을 쓸지 예측해야 한다네. 장기판에서 상대방의 다음 수를 생각하며 말을 옮겨야 하듯이 말이네.

그리고 침해 제품의 밸류체인은 알아봤는가? 경고장의 수신인은 완성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로 되어 있더군. 그 제품의 유통경로, 판매자와 사용자 등의 정보와, 핵심 부품의 납품처도 알아볼 필요가 있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특허 침해는 제조자뿐만 아니라 판매자, 사용자 혹은 핵심 부품의 납품자에게서도 성립할 수 있지. 그 밸류체인을 잘 알면, 그 모두를 대상으로 공격하거나, 전략에 따라 선택된 어느 한두 곳만을 공격할 수도 있지. 예를 들어 백화점 등 유통업체나 그 제품을 쓰는 큰 기업을 공격할 수 있다면 그 압박 효과가 다르겠지? 그런 걸 잘 알아야만 최소의 노력과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전략이 나올 수 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특허권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해결방향이나 목적은 무엇인지 아는가? 침해에 대한 응징인가, 손해에 대한 보상인가, 단순한 견제 수준인가? 이런 점을 고려하면 경고장의 발송 여부 혹은 그 내용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을 거야. 그 외에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적지 않네. 특허권자는 이 제품을 얼마나 출시하고 어떻게 유통하고 있던가? 그렇다면 특허 침해가 어떤 형태로 업무에 지장을 주고 그로 인해 특허권자는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침해자의 생산능력, 제품의 품질, 경쟁 혹은 성장 가능성 등은 어떠한가? 등도 알아두면 도움이 될 걸세.

혹시 침해자가 우리 고객과 좋은 비즈니스 관계로 승화될 가능성은 없을까? 그리고 경고장 이외의 다른 해결 방법, 예를 들어 협상, 조정 등의 여지 등에 대해서도 고려해야지. 경고장의 언어도 무시할 수 없네. 경고장은 그 목적에 따라 언어와 표현이 달라지겠지. 그리고 언어란 사람의 품격을 나타낸다네. 간혹 천박한 경고장을 받아보기도 하는데, 그건 그 대리인뿐만 아니라 그 고객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야. 언어의 선택에 신중해야지.

지금 자네의 이 경고장은 고객의 요구에 부응한 잘 작성된 모범 답안일세. 하지만 정답이라고 해서 항상 옳고 좋은 답이라고는 할 수 없네. 당초 고객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그 정답은 잘못 출제된 문제에 대한 답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고객 요구의 결과가 고객의 이익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네가 의사라고 생각해 보게. 환자가 찾아와서 제 맘대로 진단한 바에 따라 부적절한 치료를 요구한다면 하세. 아무리 본인이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들어줘서는 안 되지. 올바른 진단 결과에 따른 올바른 치료 방법을 말하고 그에 따르라고 설득해야겠지.

의사가 환자의 건강을 위해 존재하듯이, 우리 변리사의 존재 이유는 고객의 성공을 돕는 데 있다네. 우리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맹목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제공하는 용역업체가 아닐세. 변리사는 고객의 성공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그것을 최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고객에게 헌신하는 기업의 책사이어야 한다는 점, 꼭 기억하여야 하네. 자 그럼 자네의 이 경고장은 우리 고객의 성공을 돕도록 충분히 전략적으로 고려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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