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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땅부자였던 김갑순
조선 최고의 땅부자였던 김갑순
  • 경남매일
  • 승인 2023.09.2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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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김갑순은 조선 말엽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의 시대상을 알게 하는 삶을 살았다. 본성이 착하여 좋은 업을 지으면서 살아갈 인생이 돈과 권력의 맛을 알고 악업의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한 때는 조선 최고의 땅 부자였다. 돈과 권력 등은 일시적으로 삶을 편하고 누리게 하지만 덧없는 것으로 악을 짓지 말고 가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반면교사의 삶이었다.

김갑순은 조선 말엽 공주 장터의 주막집 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아버지와 형이 죽어서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공주 감영에서 관노로 잡일을 하였는데, 아주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공주 감영의 관노로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어두운 저자거리에서 불량배들에게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한 여자를 사력을 다해 구해 주었다. 이 여인과 의남매를 맺게 되는데, 이 여인이 얼마 후 충청남도 관찰사의 소실이 되어 김갑순을 관노 신분에서 공주 감영의 아전이 되도록 해 주었다.
아전 생활을 하면서 부지런히 공부를 하여 한글과 한자를 깨우쳤다. 어느 날 관찰사를 만나러 온 허름한 행색의 선비를 만나게 된다. 이 선비는 관찰사와 어릴 적 친한 친구였으나, 귀찮고 별 볼 일 없는 친구라고 판단한 관찰사가 면담을 거부하여 그냥 돌아가는 중이었다.

초라한 몰골의 선비가 불쌍해 보여 그 사연을 물어보니 과년한 딸의 혼숫감을 마련할 능력이 없어서 친한 친구였던 관찰사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하였다. 측은한 생각이 든 김갑순은 자기 집에 있던 물건과 돈을 마련하여 나귀에 실어 보내면서 혼수에 보태고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갚으라고 하였다.

1년 뒤 이 선비가 탁지부의 고관으로 발탁되면서 김갑순의 은혜를 갚고자 서울로 불러서 총순의 벼슬을 하게 된다. 이 고관의 후원과 이용익의 신임으로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봉세관이 되고 여러 지역의 군수를 지내게 된다.

김갑순은 봉세관이 되기 전까지는 성실하고 의로운 생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봉세관이 되고 난 뒤 충청도 연산군에 있는 선화궁 소유의 궁장 터 수천 마지기의 토지를 매부인 하치관에게 맡겨서 한 마지기당 벼 한 섬씩 초과 징수하여 착복하였다. 6개 지역의 군수를 역임하면서 세금을 횡령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관직에 있을 때의 인맥을 동원해 개발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땅을 매입하거나 조선총독부에서 인허가권을 특혜받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의 공직을 맡으면서 뒷거래 정치를 하면서 민원을 해결하고, 금융과 세제상의 특혜를 받았다.

단군을 숭배하는 연기군 지역의 금강대도 신도들 수십 명이 경찰에 구금되고 여러 명이 옥사한 사건도 김갑순의 밀고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단군성전을 헐고 역대 조선 총독의 사진을 진열하여 참배하도록 하고 건물의 자재는 자신 소유의 호텔을 짓는데 사용했다.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긴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식산은행 등에서 저리의 돈을 빌려 대전역 주변의 땅을 사들였다. 1932년 대전지역 유지들을 동원하여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데 성공하였다. 도청이 그의 땅에 들어서자 그의 땅값은 치솟고 떼돈을 벌게 된다. 도청사의 보상금으로 공주군과 논산군 주변의 막대한 토지를 매입하였다. 1930년대 말 그가 소유한 토지는 1,000만 평이 넘었다. 대전 시내의 땅만 22만 평으로 당시 대전부의 약 40%가 그의 소유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다른 친일파처럼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총력조선연맹,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지원을 위해 조직된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있는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이다.

10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하며, 5남 4녀의 자녀들을 모두 세도가의 자녀들과 결혼시킨 인맥관리 기술도 유명하다. 내장원경을 지낸 김윤환,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오,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 등 친일파 인물들과 두루 사돈관계를 맺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의 해체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대법원 재판을 받았지만 고령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6·25 전쟁 시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자신이 데리고 있던 마름의 아들이 인민군 장교로 있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갑순이 가장 많이 자주 입버릇처럼 사용한 말이 "민나 도로보데스"였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모두가 도둑놈들이고 다 날강도들이다'라는 것이다. 김갑순은 해방 후 자신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친일행적을 숨기고 뻔뻔스럽게 살던 악질 경찰이나 친일파들을 보고 환멸하고 조소하는 심정으로 이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친일파들도 억울해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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