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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과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을까
낙랑국과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을까
  • 경남매일
  • 승인 2023.08.2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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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삼국사기 신라 본기 박혁거세 30년(서기전 27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였다. 변방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들에는 곡식이 쌓여 있음을 보고, 서로 이르기를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할 줄을 모르니 도가 있는 나라라고 이를만 하다. 우리가 몰래 군사를 끌고 와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과 다름없는 짓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는 돌아갔다.

이 당시에 일식을 관찰하여 기록할 정도로 문화가 상당히 발전해 있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국가체계가 갖추어지지 않고 문화도 발달되지 않은 작은 나라가 신라라고 인식하는 것은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한 역사교육의 결과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남해왕 11년(서기 14년) "왜인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함으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나라가 비었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금성을 공격하니 급박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서워서 물러가 알천가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6부의 군사 1000명이 그들을 추격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왜인은 누구일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낙랑의 왕 최리(崔理)는 옥저 지역에 유람을 온 고구려 왕자 호동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에게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다. 그 뒤 대무신왕은 낙랑을 기습하여 낙랑왕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유리왕 13년(서기 36년) 낙랑이 북쪽 변방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유리왕 14년(서기 37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없애니 낙랑 백성 5000여 명이 신라에 와서 의탁함으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최리의 낙랑국이 평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후한서>에 고구려 태조왕(서기 146년)이 서안평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서안평이 압록강변 단동에 있었다고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에 의거하여 주장하고 국내 고대사학계도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동북공정 이전의 중국사료를 학술적으로 연구한 지구인의 고대사공부방에 의하면 서안평은 하북성 고비정시 거마하 유역이라고 한다.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하여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해 동북공정에 협조한 학설보다 훨씬 제대로 된 역사연구 결과다.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최리의 낙랑국은 우리 조상이 세운 나라로 평양에 있었고, 한나라가 세운 낙랑군은 중국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양시 낙랑구역에서 나오는 이 시기의 고분 및 유물들은 낙랑국의 것이라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은 패수(浿水)다.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는 패수를 `어니하`로 보았는데, 현재 요하 서쪽의 `대릉하`다. 북경대에서 고조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북한의 이지린도 <고조선 연구>에서 패수는 `대릉하`라고 한다.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한 역사교육으로 정인보 선생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정인보 선생은 삼일절ㆍ제헌절ㆍ광복절ㆍ개천절의 노래 작사를 한 당대 최고의 국학자이면서 민족주의 사학자였다.

이병도의 스승인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패수를 압록강으로 이병도는 청천강이라고 한다. 동북공정을 하는 중국에서는 한국 사학계의 패수 비정을 보고 횡재했다고 여기면서 청천강으로 적어 놓는다.

"태강지리지운 낙랑수성현유갈석산 장성소기(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태강지리지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이곳이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사기』 `주석`)이 갈석산은 북경 근처의 하북성 난하하류 동부유역에 있는 산이다.

"패수 출낙랑누방현 동남과임패현 동입우해(浿水 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수경(水經)』서쪽 바다로 흘러가는 청천강이나 압록강은 패수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중국 역사서를 보면 한 무제가 세운 낙랑군은 평양이 아니라 현재 중국 하북성과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 영토에 세운 낙랑군은 중국 요서에 있었고, 박혁거세와 대무신왕조에 나오는 낙랑국은 단군의 후예가 세운 나라로 평양에 있었다. 요서 지역의 예족 일부가 동쪽으로 옮겨와 동예가 되었듯이 요서 지역의 낙랑인들이 평양으로 옮겨와 낙랑국을 세웠던 것이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도 식민사학은 낙랑국은 설화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평양에 한 무제가 세운 낙랑군이 무조건 있었다고 주장한다. 식민사관 틀에 맞지 않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였다. 그러나 YouTube에서 `KBS HD역사스페셜-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풍납토성`을 보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맞다는 것을 역사유물과 유적이 증명해 준다.

낙랑국과 낙랑군에 관한 바른 역사 사실을 교과서에 실어서 교육해야 하겠다. 역사주권과 영토주권을 제대로 찾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여 미래의 통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민사학 카르텔을 극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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