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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과 세키부네
거북선과 세키부네
  • 김제홍
  • 승인 2023.02.08 2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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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사천해전(1592년 음력 5월 29일)은 이순신 장군의 4번째 해전이고, 최초로 거북선이 사용된 해전으로 기록돼 있다. 앞선 3번의 해전(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크게 패한 일본 수군은 여전히 수륙병진전략을 고수하며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왜군들이 사천에 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 장군은 거제에서 사천으로 이동했다. 사천의 선창에서 일본 척후선(小早)을 격침하고 사천 포구에서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거북선을 앞세워 12척 중 10척을 침몰시켰다. 나머지 2척은 일부러 도망가게 두어 양민들에 대한 노략질을 막은 것이고 다음날 새벽 도주하는 나머지 2척도 침몰시켰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 지휘 능력은 언제나 탁월했다.

거북선(龜船)은 판옥선의 갑판 위에 뚜껑을 씌운 뒤 나무판으로 덮은 배다. 나무판에는 왜군들의 장기인 등선육박전(登船肉薄戰)을 막기 위해 송곳을 꽂았다. 선수부에는 용머리 모양의 충각 겸 포문을 만들어 그곳에서 전면부로 화포를 쏘게 했고 선미부에는 거북이 꼬리를 세우고 역시 화포를 쐈다. 다만, 일측의 자료에는 용머리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거북선은 앞뒤와 선체 측면의 포문으로 전후좌우 각각 6개씩 화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안타깝게도 칠천량 해전에서 모두 침몰당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왜군들에게 공포의 기억으로 남아 복카이센(沐海船), 또는 기카이센(龜甲船)으로도 불렸다. 왜군들은 거북선을 낮춰 부르는 말로 메쿠라부네(めくらぶね, 盲船)라고 불렀는데, 왜군 함대에 뛰어들어 마치 장님처럼 마구 충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거북선을 벤치마킹한 메쿠라부네도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히데요시가 있는 오사카 해안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고안된 전투함인데, 거북선과 달리 함포도 부족하고 배의 장갑은 그냥 대나무 다발 여러 개를 엮어 얹어 놓은 것이라 화살이나 중소형 총포의 공격만 어느 정도 막아주는 수준이었다. 당시 구키 모리타카가 이끄는 수군이 운용했으며, 아버지 구키 요시타카의 조언이 반영된 것이다.

구키 요시타카는 해적 출신으로 한산도대첩 이틀 후인 1592년 음력 7월 10일, 안골포 한산도대첩에서 겨우 도망친 42척의 배마저 모두 잃고 도주한 장수이다. 도주하면서 가져간 대장군전(천자총통용 화살로 약 33㎏)은 아직도 구키 가문에서 가보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대형 전투함은 아타케부네(安宅船)이다. 아타케부네는 전국시대 봉건영주들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2층 또는 3층 누각을 설치한 것이 특징인데, 주력함이 아니라 기함으로 주로 사용됐기에 그 수는 적었고, 실제 해전에서 싸운 주력함은 중형 전투함인 세키부네였다.

세키부네(關船)는 바다의 관문인 해협을 지키는 배라는 뜻으로, 지방 영주 또는 해적들이 어선이나 상선에게서 통과세를 받거나 노략질하던 속도가 빠른 배에서 유래되었다. 세키부네 중 작은 것을 고바야(小早)라고 하는데 주로 척후선으로 이용되었다. 세키부네를 비롯한 일본 배들은 가공하기 쉬운 삼나무나 전나무로 만들었는데 매우 얇게 정밀하게 만들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의 판옥선은 가공하기 힘든 소나무로 만드는 바람에 두꺼워서 두 배가 부딪칠 경우 일본 배들은 박살이 났다. 우리나라 국목을 소나무로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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