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02:34 (월)
봉급쟁이에게 너무 잔인한 오월
봉급쟁이에게 너무 잔인한 오월
  • 허균 기자
  • 승인 2015.05.12 1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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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 제2사회 부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모더니즘 시인 T. S. 엘리어트가 1922년 출간한 시 ‘황무지’의 도입부다. 엘리어트는 ‘황무지’를 시작하면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명시한다. 그것도 최상을 의미하는 best라는 단어를 넣어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묘사했다. 이 시는 20세기 시 중 가장 중요한 시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시의 영향으로 사월은 잔인한 달이 됐다.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직장인들에게 제일 잔인한 달은 사월이 아니라 오월이다. 봄바람에 태동을 시작한 만물이 영그는 오월은 무엇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박봉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 오월만큼 잔인하기도 어렵다.

 오월에 들어서면 우선 첫날이 근로자의 날이다. 경기 불항의 장기화로 근로자의 날이라고 업주에 날을 세우기도 힘든 시절이 아닌가. 그렇지만 근로자의 날이 직장인들에게 나쁜 날이 아니기에 잠시 즐거워해 본다. 즐거운 기분도 잠시, 피해갈 수 없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버티고 있다. 각 가정의 아이들이 모두 그렇듯 어린이들의 욕구는 부모의 지갑 두께를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필자도 어릴 적 내 부모의 지갑 무게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라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 지갑의 두께를 가늠하지 않은 채 졸라대기만을 일삼는 자식들은 이 시기 동안 마주 볼 때마다 한계를 시험한다.

 어린이날을 겨우 넘겼더니 어버이날이다. 어릴 적 문방구에서 판매하는 카네이션 한 송이나, 꽃집에서 판매하는 조그마한 화분에 심겨진 카네이션은 부모 두 분을 만족시키는데 1만 원이면 족했지만 10배가 넘는 금전으로 어버이날을 넘겼다. 인근에 있는 처갓집을 찾아보느라 2배의 금액이 들어가는 건 건강한 장인ㆍ장모를 둔 봉급쟁이들의 고통(?) 중 하나다. 최소한의 금액으로 어버이날을 때웠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유행하고 있는 휴지통에서 돈다발을 빼내는 묘기를 선보인 동영상을 본 뒤부터 뒤통수가 가려운 건 기자만의 느낌은 아니지 싶다.

 약간의 금액으로 가정의 평화를 지켰다 생각하고 한숨을 쉬려니 금세 스승의 날이다. 박봉의 월급쟁이인 기자에게 내 스승을 돌볼 여유가 있으리 만무하다. 아들 딸 두 자녀의 담임에 단과 학원, 예체능 선생까지 챙기려니 허리가 뻐근하다. 그러고 나니 25일이 석가탄신일이다. 무신론을 주장하며 무교임을 천명하고 살고 있지만 이 좋은 날씨에, 이 좋은 연휴에 집구석에만 박혀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부처를 믿어서가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의 등쌀에 아니 푸르디푸른 하늘과 산들바람에 떠밀려 어디로든 가야만 할 것 같은 올해 석가탄신일이다.

 열두 달 중 가장 잔인한 오월은 달력에 붉게 칠해진 날만이 괴롭히는 건 아니다. 5월의 신부가 꿈이었던 집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기자의 결혼기념일이 또 오월이다. 20주년을 바라보는 결혼기념일을 어떻게 넘길까 고민 중에 확인된 절친의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은 이마의 주름을 더욱 깊게 후벼 판다. 절친이 SNS에 올려놓은 건 결혼 20주년을 기념하는 부부동반 발리 여행 사진. 행복해 보이는 친구의 미소를 보며 살기(?)를 느꼈다면 좀 과장일 게다.

 이뿐만이 아니다. 푸르고 따스한 날씨를 가진 오월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 동문들의 체육대회가 한창이다. 이래저래 찾아주고 불러주는 동문이 많다는 건 자랑해야 할 일이지만 얄팍한 내 주머니는 이마저도 부담스럽다.

 이렇듯 오월은 잔인하기만 하다. 시인 엘리어트는 가장 잔인한 달로 사월을 뽑았다. 하지만 기자가 꼽은 잔인한 달은 단연코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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