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00:29 (월)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3.11.17 2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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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1)
 이후 나에게는 난생처음 껌을 선물로 준 인주 삼촌이 제대해 큰집에서 방을 하나 차지하고 있었다.

 인주 삼촌은 제대 후 삼천포 상이용사 분회 회장을 했고 국회의원 정갑주 위원의 보좌관도 하셨다.

 그리고 갓 생긴 삼천포 고등학교의 학생들의 군사 훈련을 시키는 교관으로 삼천포 고등학교에도 잠시 근무를 했다.

 당시 상이군인 단체는 강력한 힘이 있는 단체였고 국회의원 하면 안 통하는 것이 없는 막강한 세력의 시기였고 또 삼천포 유일한 고등학교 훈련교관 선생이니, 인주 삼촌은 얼마나 기세가 등등 한지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다고 본다.

 한번은 삼천포항에 군함이 정박하고 해군들이 삼천포 시내에 깔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 집집마다 처녀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단속을 하여야만 했다.

 그때 인주 삼촌이 잠시 집에 들렀었는데 해군들이 총을 들고 우리 집을 포위한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 어머니,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들은 삽시간에 공포에 질렸다.

 사건은 이러했다.

 시내 거리에서 해군 두 명이 지나가는 아가씨를 조롱해 이 광경을 목격한 인주 삼촌이 해군들을 두들겨 팬 것이었다.

 실컷 얻어맞은 두 해군는 군함으로 도망가서 이 사실을 다른 사병에게 알리고 이에 분노한 사병 열 명 정도가 인주 삼촌을 추적해 우리 집을 포위한 것이었다.

 사정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인주 삼촌을 옆집을 통해 도망가게 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또 한번은 우리 집에 “하이면 지서에서 인주 삼촌이 경찰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이 기별은 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랴부랴 인근 하이면 파출소로 달려갔다.

 하이면 파출소에서 인주 삼촌은 얼마나 맞았는지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았고 며칠 후 건강을 회복하게 됐다.

 인주 삼촌이 왜 죽도록 맞았는가 하면, 삼촌이 하이면 파출소로 가서 무슨 이유인지 파출소 직원들를 모조리 두들겨 패고 파출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이에 맞은 하이면 파출소 경찰들이 삼천포 본서에다 “하이면 파출소에 공비가 나타났다. 지원 경찰를 보내달라”고 연락을 했고 그 연락을 받고 삼천포 본서에서 경찰들이 한 트럭 타고 하이면 파출소까지 와서 보니 공비가 아니고 삼천포의 유명한 말썽꾸러기 삼촌을 알아보고 구속을 시켜봐야 곧 풀려 나오니 구속해봐야 소용없는 일인 줄 알고 분풀이로 많은 경찰들이 한꺼번에 덤벼 삼촌을 죽도록 패 버린 것이었다.

 그 후에 삼천포 정치권에서는 하이면 파출소와 삼천포 경찰서에서 무고한 시민을 죽도록 패고 공비도 아닌데도 공비출현 경고까지 내리고 또 경찰이 한 트럭이나 출동했다는 이유로 하이면 파출소 소장과 직원들이 중징계를 받게 되면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또 한번은 우리 집 앞에는 트럭 창고가 있고 트럭 운전을 하는 분이 아버지 친구로 삼천포 시내에서 주먹이 제일 센 박용도라는 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인주 삼촌이 그분에게 도전해 큰 싸움이 벌어졌다.

 주먹이 오가고 싸움이 해결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어지자 급기야는 박용도라는 분은 집에서 권총을 들고 나와 인주 삼촌에게 쏘려고 해 어머니가 권총을 뺏으려 그분의 팔에 매달리기도 하셨다.

 박용도 그분은 자기가 인주의 형 친구인데, 감히 형 친구에게 덤비는 것에 대해 더 화가 난 상황이었다. 난리가 났지만 다행히 인명사고는 나지 않고 싸움이 끝났다.

 그렇게 여러 사건을 겪은 후 인주 삼촌은 남양의 도자기 회사 간부의 여동생 되는 처녀와 결혼해 삼천포에서 몇 년 더 살다가, 고향을 떠나 목포에 가서 몇 해를 살다가 서울로 와서 국일관 뒷골목에서 구멍가게와 술집을 하시면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다 허리 디스크 병을 얻어 몇 번씩 수술을 하시면서 십년 넘게 고생고생하다 결국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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