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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 운동과 영산
3ㆍ1 운동과 영산
  • 성득용
  • 승인 2012.02.24 0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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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득용창녕군 문화해설사
 3ㆍ1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해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된 이 운동은 약 2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했으며, 일제는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집회인수가 202만여 명, 사망자가 7천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는 일제의 기록이 있다.

 1919년 오후 3시 당시 서울 종로의 음식점인 ‘태화관’ 한용운이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짐하는 간략한 선포와 만세 3창을 고창했으며, 불과 15분 만에 전격적으로 낭독식을 끝내고 경찰이 오자 스스로 체포돼 갔다.

 한편 파고다공원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단이 별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로 나가 시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남녀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전국에서 상경해 대기하던 시민과 민중이 가담해 그들의 독립시위의 의지와 열기는 더욱 고조돼 전국적으로 확산돼 갔다.

 영남지역에서도 부산 동래, 마산, 밀양, 함안, 영산이 가장 빠른 시기인 3월 13일에 운동을 전개해 오래도록 지속했고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동원 인원이 11만에 이르러 경기도의 17만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원이었다고 한다.

 특히 창녕 영산면은 ‘구중회’를 주축으로 주로 천도교 계통의 청년 학생 세력이 중심이 돼 24인의 청년 결사대를 조직해 영산보통학교 학생들과 같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영산에서 시작한 운동이 주로 장날을 이용해 남지 등 인근주민들까지 합류 창녕까지 진출했다.

 이후 이들은 각계에서 농민운동, 청년운동의 지도자 또는 노동야학회의 운영, 민중개화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활동 하다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해 체포 구금된 후에 숱한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 되거나 만주로 망명했다.

 당시에 일제가 남긴 재판 기록으로 이들의 활동 사항과 출신을 보면, 면서기, 농업인, 소금장수, 어물상, 이발직 등 계층과 직업이 다양했으며 결사대원들은 이후 변절하거나 일제에 동조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24인의 결사대원 중 2인만이 인근의 계성면 사람이고 나머지 22인이 영산면사람 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비단 영산인들 만의 자랑이 아니고 창녕군의 자랑인 것이다.

 과거 영산지역은 삼한시대에 ‘탁기탄’ 이라는 소국이 존재 했다는 학설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에는 서화현, 상약현 으로 불린 독립된 현이었으며, 조선시대 한때는 창녕군과 영산현이 합해져 영산군 으로 불렸던 때도 있었다.

 오랜 기간 독립된 현, 군의 중심지역 이었던 영산인들의 정신 속에는 창녕의 중심은 영산 이라는 긍지가 대를 이어 전해온다. 그 긍지가 일제강점기라는 국가적 위기 때 항쟁의 정신으로 나타난 것이 3ㆍ1운동인 것이다.

 이 3ㆍ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창녕군은 해마다 3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민ㆍ관이 협력해 3ㆍ1 민속문화제를 열어 중요무형문화제인 ‘영산쇠머리대기’와 ‘영산줄다리기’라는 민속행사를 재현하는 축제로 발전시켰다. 쇠머리대기와 큰줄다리기는 한마음이 되지못하면 재현 할 수 없다. 함께 힘을 쓰는 우렁찬 함성 속에서 그날의 3ㆍ1만세 소리를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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