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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⑤ 리커창-시진핑은 누구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⑤ 리커창-시진핑은 누구
  • 승인 2007.10.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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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 15세때 농촌대대 서기 돼 ‘두각’
시진핑, 후 주석의 절대적 신뢰 받고 있어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전대)를 앞두고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가 리커창(52) 랴오닝 서기와 시진핑(54) 상하이 서기의 양자대결로 압축되고 있다.

17전대에서 모두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시되는 리·시 서기는 향후 5년간 경쟁을 거쳐 실적을 평가받음으로써 후진타오 국가주석에 이어 공산당 총서기 자리에 오르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모두 50대의 두 인물은 젊은 시절 문화대혁명을 몸으로 겪으며 농민으로 일했던 경력과 함께 중국 양대 명문의 문과 대학을 전공한 공통점이 있지만 정치적인 배경이나 개인적 성격 등은 상이하다.

◇ 시진핑 = 혁명원로인 시중쉰 전 전인대 부위원장의 막내아들로 보시라이 상무부장, 위정성 후베이성 서기와 함께 태자당 그룹의 대표주자. 동시에 칭화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칭화방’의 일원이기도 하다.

부친 시중쉰은 1962년 펑더화이 반당집단으로 몰려 숙청됐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78년 복권돼 광둥성 서기로 덩샤오핑에게 경제특구 설치를 건의하기도 했던 인물. 태자당에 속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 부친이 사인방의 박해로 조사, 수감, 하방 생활을 한 탓에 유복하게 지내지 못했고 15세때엔 산시 성 오지에서 농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로인해 고위간부 자제이면서도 서민적 정서를 갖고 있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다른 고위간부 자제와 비교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하방된 베이징 지식청년 가운데 처음으로 농촌대대 서기가 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75년 부친의 복권과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칭화대 공정화학과 졸업 후 국무원 판공청에서 겅뱌오 부총리 비서로 배치돼 일하다 1982년부터 베이징 근무를 포기하고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를 시작으로 20여년간 지방만을 돌며 근무해왔다.

40대 후반부터 푸젠 성장, 저장 성장.서기를 지내면서 차세대 주자로 꼽히기 시작했다. 대만과 면한 동부 지방의 고위직을 지내면서 대만 자본을 유치하는 등 대만통으로 알려졌다. 또 상하이방의 주요 세력거점인 저장성 서기를 오래 지냈다는 점 때문에 범 상하이방의 일원으로도 분류되기도 한다.

2002년 저장성 서기가 된 후 5년만에 저장성을 중국에서 민간기업이 가장 발전한 성으로 키웠다는 공로를 인정받은 이후 천량위 상하이 서기가 비리 혐의로 축출되면서 지난 3월 상하이 서기로 임명됐다. 신화통신과 인민일보 등 중국 관영 언론은 최근 잇따라 특집기사를 통해 시 서기의 7개월 임기 동안 상하이가 안정을 되찾고 한층 조화롭고 살기 편한 도시가 됐다고 격찬한 바 있다.

확실하게 밀어주는 끈이 없다는 평을 들었던 시 서기는 오히려 이 점이 모든 계파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장점으로 부각되며 후계자 후보로 급부상했다. 특이한 점은 중국의 유명가수였던 펑리위안(45)과 부부 사이라는 점. 펑리위안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소속 가무단 단원이자 베이징대 겸임교수를 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으면서도 부부 금슬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자당 출신이 배경이 돼 원로들을 극진하게 대우하고 군 간부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우대해준 것이 입신의 배경이 됐다는 평이 있다.

◇ 리커창 = 고향은 후 주석의 원적과 같은 안후이성이다. 안후이 딩위안현의 당 간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졸업후 고향의 농업공사에 배치돼 농민 생활을 한 경력을 갖고 있다.

‘리틀 후’라는 별명처럼 후 주석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후배로 성실함과 함께 절대 화를 내지 않고 몸가짐이 흐트러짐이 없는 점이 후 주석과 일맥상통하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인관계가 뛰어나며 학구적 자세를 갖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으면 즉각 스스로를 책망한다”고 말해왔다.

문화대혁명 종료 후 대입시험 부활과 함께 1978년 23세의 나이로 베이징대 법학과에 입학, 학생회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다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로 근무할 때에는 학생회 주석 장웨이와 함께 ‘양대 호걸’로 불리기도 했다.

대학졸업 후 공청단을 관장하던 후치리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에 의해 발탁돼 공청단 중앙에 들어간 그는 당시 상무서기이던 후 주석과 함께 근무하면서 후보위원, 후보서기, 서기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1993년 리 서기는 후 주석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공청단 최고위직인 중앙 제1서기에 올라 5년을 재직했다. 공청단 경력만 16년에 이르러 후 주석보다 내부 기반과 인맥이 튼튼하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공청단 중앙 재직기간에 베이징대 대학원에 진학,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기도 하다.

1998년 44세의 나이로 허난성 성장 대리 겸 부서기로 임명돼 최연소 성장 및 첫 박사학위 보유 성장을 기록한 그는 정치지도자로서 경력에 주요한 전기를 맞았다.

낙후한 농업지대였던 허난성에서 동부 연해안의 자본과 인재를 끌어들여 경제를 크게 끌어올렸으며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04년 노후 공업지대인 동북지방 진흥의 임무를 받고 랴오닝성 서기로 옮기게 됐다. 동북 진흥 및 국유기업 개혁이라는 두 과제를 안고 랴오닝성으로 옮겨온 그는 그동안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올들어 랴오닝성의 경제성장률을 13년만에 최고치로 끌어올리며 비판을 잠재우고 있다.

특히 랴오닝성의 숙원과제였던 주택난을 중앙정부의 지원을 통해 주택 120만호 공급을 통해 일시에 해결, 랴오닝성 주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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