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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의 숙명
오브제의 숙명
  • 정창훈 기자
  • 승인 2015.10.01 0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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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훈 편집위원
오래된 것이나 다양한 것을 수집하고 애지중지하는 것은 그 안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쓸모없는 물건들 속엔 지나온 날들의 기억과 추억이 깃들어 있고 그것이 미래에 활력을 불어넣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라는 역사가 없고 미래를 그려볼 수도 없는 것이다.

 40~50년 전에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 중에 오늘날에도 그 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들이 있다. 태엽을 감는 벽시계와 수동카메라가 있다. 미닫이문이 텔레비전 앞에서 달려 있어 손으로 열고 닫아야 했던 금성TV가 있었다. 그 시절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디자인의 소파카펫 등 아날로그적인 형태의 사용법을 지니는 것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전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면 그것이 바로 빈티지 스타일이 아닐까? 빈티지는 획일화와 디지털화된 현대사회에서 개성 있는 자아를 찾아 다른 이들과는 차별된 이미지를 옛것으로 재구성해 사람들에게 익숙함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정서적 콘셉트으로 오래돼 가치 있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수집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인 중에 각국의 화폐를 수집하거나, 엽서나 우표를 수집해 앨범에 모으는 등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수집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수집품과 함께 추억을 쌓기 위해서,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등 다양하다. 수집이 그저 재미있는 취미나 생활의 활력소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모으는 사람의 성실함을 나타내는 역할도 하는 것 같다.

 수집이라는 취미는 우리와 친숙하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껌 종이, 과자봉지 안에 들어있는 상표, 엽서, 각종 우표, 인형, 광고 전단, 딱지 등을 모았다. 특별히 편지봉투 위에 스탬프가 찍힌 우표, 연하장, 크리스마스실을 모으는 것이 취미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성냥과 일회용 라이터를 모았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도 팔찌와 종을 수집하고 있으니 나름에 수집마니아라고 할 수 있다.

 낡고 오래 됐다고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까?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한자로 ‘一千九百五年’이라고 적혀있는 주판을 발견했다. 언젠가는 자식들한테도 전하고 싶었던 물건 같았다. 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주판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주말이면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혼자 계시는 어머니한테 찾아가기로 했다. 그중에서 내가 찾아뵙는 횟수가 가장 저조한지라 죄송스럽다. 이번 초여름은 긴 가뭄이라 산야의 대지는 푸석푸석 먼지가 나서 밭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항상 소일이라도 했다.

 참깨는 아카시아 꽃이 피고 뻐꾸기가 울면 참깨를 심으면 된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항상 조금씩 앞당겨 심었다. 유달리 긴 가뭄에 참깨씨앗이 싹이 나지도 못하고 말라버렸다.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씨앗이 어머니의 손길로 자랄 것이다.

 정성을 다해 곡식을 심고 주위에 잡초를 뽑고 밭을 매고 수확을 해서 자식들에게 보내줄 때까지 또 다른 자식처럼 보살피고 있다. 그 씨앗들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풍성함을 안겨 드린다. 들에 나가실 때 분신처럼 갖고 다니는 호미가 있다.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호미는 세월만큼이나 가벼워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오브제의 숙명이 있다.

 오브제(objet)란 일반적으로 물건, 물체, 객체 등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이다.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서라도 거창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슴 속에 담아두는 것 이상의 소중한 추억과 흔적을 조금씩 찾고 모으고 정리해서 간직하고 싶다. 함께 생활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찾아뵙고 애지중지 하는 오브제를 찾고 간직하고 의미를 간직하고 싶다.

 얼마 전 일본의 요양시설을 방문했을 때 시설에 계신 분들에게 각자의 집에서 이용하던 필수품들을 가져와서 쓸 수 있도록 권장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일상에서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릇, 수저, 침구류 등이 현대 의료편의 시설과 조화를 이루면서 시설을 운영하는 관리자나 고객에게 오브제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찻잔, 밥과 국그릇, 수저, 배게 등도 세월과 더불어 정직하게 닳고 낡아진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거동이 불편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가더라도 내가 늘 사용해오던 필수품들은 가져가고 싶다. 친숙함과 편안함 속에서 새로움을 경험하고 싶다. 살갗은 주름지고 등은 구부러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는 옛날부터 애지중지 사용해오던 소지품들이 향수이고 그리움이고 분신이다. 그것들을 신기해하며 바라보는 우리 세대와 다음 그 다음의 신세대를 이어주는 오브제의 숙명이 그곳에 있다. 그냥 오래되고 때 묻고 낡고 초라한 물건이 아닌, 영혼이 긷든 살아있는 보물이고 역사다. 삶의 흔적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정서가 필요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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